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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19.4.29. 방탈출 말고 언니탈출

by 푸휴푸퓨 2019.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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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금요일 저녁, 방탈출을 했다. 처음 방탈출이란 게임을 알게 되고는 더 흥분할 수 없게 흥분했다. 예능 프로그램 크라임씬의 엄청난 팬인 난 새 시즌은 정녕 나오지 않나요- 마치 내가 그 프로의 한 복판에 들어간 양 기뻤다. 하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듯 시들해지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어서 요즘의 난 방탈출에 처음만큼 열광하지 않는다. 꽤나 비싼 값도 아마 한 몫 할 테지. 그럼에도 방탈출을 주기적으로 하는 건 만났을 때 방탈출 말고는 길게 할 이야기가 여의치 않은 지인들 덕분이다.

 

  대학 동기 세 명으로 이루어진 이 모임은 본래 5명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우리의 접점은 거의 없다시피 줄어들었다. 자발적으로 빠져나간 동기가 한 명, 자발적이면서 또 비자발적으로 빠져나간 동기가 한 명이라 이러구러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와중 약속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거리 이동도 감수하는 세 명 만이 남았다. 그렇다고 셋이서 접점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와 다른 한 명의 직업이 겹치긴 하지만 배경이 달라서 크게 할 말이 없다. 나머지 한 명-재수를 하고 대학을 입학한 언니-은 아예 다른 직종으로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메신저에서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의례적으로 만나는 모임이 몇 달에 한 번 있는 게 정상인 사이가 되었다.

 

  만남의 빈도가 분기에 한 번이나 반년에 한 번일 경우에는 서로의 근황을 업데이트하는 정도로도 몇 시간 이야기가 가능하다. 서로의 근황이 궁금한 정도로 친하기는 하니까.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언니가 내 마음속 적절한 빈도보다 더 잦게 만남을 잡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도 그냥 적당히 만났는데 점점 할 이야기가 떨어진다. 메신저도 재미가 없다. 그럼 연락이 소원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그 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랑을 올렸기 때문이다.

 

  점점 정도와 빈도가 심해지는 자랑의 어투는 몹시 거슬린다. ‘000 하게 됐어. 부럽지?’라고 보내주면 차라리 낫겠다. 갑자기 생뚱맞은 아 진짜..’와 같은 말만 던진다. 누군가 한명이 ?’라고 물어주기를 끈질기게 기다린다. 간신히 질문을 해 주면 그때부터 말이 쏟아져 나온다. 아 진짜, 나 너무 바쁜데 엘레이(어느 날부터 엘에이는 엘레이가 되었다) 출장 가야하네. 아 진짜, 나 요즘 피티 받는 거 너무 힘들어서 죽겠는데 두 달 만에 오키로 빠졌잖아. 아 진짜, 사주에서 올해는 엔조이만 많을 거라더니 들이대는 괜찮은 썸남 또 생겼어. 아 진짜, 언니 진짜 짜증나요 진짜. 물론 난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메신저가 오면 숨이 막혔고 만나서도 할 이야기가 없었다. 무슨 말만 하면 기승전-언니자랑이 되어버렸다. 변죽을 울리거나 다른 화제로 돌려보려 애쓰기도 지쳤고 내 이야기에 관심 없는 사람과 만나기도 싫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4년의 시간이 있어 만남을 거절할 순 없었다. 그냥 말을 줄였다.

 

  대화가 끊어져 애매한 모임에 언니는 방탈출을 들고 왔다. 너네 이거 좋아한댔잖아. 내가 새 테마 찾았어. 그마저 지겨워 졌어도 언니는 멈추지 않았다. 지칠 법도 하련만 홀로 검색에 예약에 쉬지 않았다. 어쩌면 속으로 너무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점점 마음이 멀어지다 못해 불쾌해서, 약속이 잡힌 금요일 오후에 한참을 고민했다. 갑자기 야근이 생겼다고 할까 고심하다 결국 최대한 늦게 갔다. 방탈출 게임과 차 한 잔의 시간 정도만 허락되도록.

 

 게임은 제법 재미있었다. 우리 셋에게 딱 맞는 난이도의 산뜻한 테마였다. 방탈출이 즐거웠기 때문에 카페에서 언니가 약간씩 시작하는 자랑을 적당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냥 잡다한 이야기를 잡다하게 했다. 의미 없는 말을 하는데 옆 자리에 앉은 언니의 핸드폰이 슬쩍슬쩍 보였다. 오잉, 무슨 오픈채팅방을 저렇게 여러 개 들어갔지. 무슨 어플 알람을 저렇게 많이 받지. 원래 이렇게 번잡스러운 걸 좋아했나 의아했다. 사랑하던 차와 화초는 어디 두고 스마트폰이랑 연애 중이람.

 

  10시가 넘어서 넌지시 가고 싶단 뜻을 보였는데 언니가 직설적으로 집에 가기 싫다고 푸념하며 막았다. 그렇게까지 한 적은 없는데 더 놀고 싶은가 보지, 차마 일어날 수 없어 앉아 있었다. 언니가 문득 말했다. 나 요즘 좀 불안한 것 같아. 자세히 생각해보면 불안할 필요가 없는데 근데 괜히 불안해.

 

  대학생 때 누구보다 자존감이 높고 확신에 차 있던 언니가 어쩌다 이런 말을 하게 되었나 싶었다. 언니는 다섯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취직해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가장 빨리 돈을 벌었고 자기가 일을 잘한다는 내색을 항상 해왔다. 진급도 빨라서 아직도 말단인 나와는 달리 이미 대리가 된 지 꽤나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승승장구한 언니가 글쎄, 불안하대. 그 언니가. 고요한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핸드폰으로 모든 여백을 메우는 모양이었다. 우리한테 한 자랑은 불안을 감추고 자신을 부풀리는 용도였던 것이다.

 

  우리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동년배의 뷰티 크리에이터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 그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고는 생각하고 결정할게 너무 많아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대요. 생각을 멈춘다는 생각 자체가 두려웠대. 그래서 평온을 얻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대요. 힘들어도 일단 시작을 해야 하나 봐.. 다른 동기도 거들었다. 언니 그 왜 유명한 연애 코치 있잖아요. 그 여자도 명상 시작해서 무슨 센터도 열었다고 나와서 한 번 봤는데 시설도 꽤 좋더라고요.

 

  불안한 언니가 갑자기 명상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내가 언니의 고통을 알았다고 해서 갑자기 자랑이 기껍게 들릴 리도 없다. 언니의 자랑이 마음을 나눠야 하는 친구가 아니라 심심이한테 보낸 메시지였다는 게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더 하찮아졌다. 그저 이 언니가 불안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대학생의 나는 상상도 못 했을 거란 생각이 위로를 하게 했다. 에휴, 자신만만의 표본인 언니가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한다니 애처롭기도 하지. 우리 모두 잘 버티고 살아보자고요. 별 거 있나요.

 

  금요일 만남의 금전적 정산을 끝으로 언니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부터 이미 대화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나는 말이 없는 이 상태가 훨씬 좋고 정다운 메시지건 마음이건 건넬 생각 따위 들지 않는다. 불안하다는 말도 진정 이해해주길 원해서 한 말은 아니었을테지. 내가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언니는 여기저기에 자랑을 하며 자존심을 잘 채울 것이다. 나는 심연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음을 잠깐 떠올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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