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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19.5.9. 프롤로그

by 푸휴푸퓨 2019.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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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날이지만 할머니께 전화드리는 걸 잊었다.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저녁에 엄마가 말했다. 낮에 할머니가 네 전화 받았다고 좋아하시더라. 뭐라고? 나 전화한 적 없는데. 할머니가 받았다고 하시던데. 며칠 전에 서울 도착했다고 했던 전화랑 착각하셨나 보다. 요즘 할머니가 날짜 감각이 별로 없으셔서 그래.

 

  할머니는 어느 동네의 부잣집 큰딸로 태어났다. 먹고 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고, 집에는 늘 일하러 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고고하게 앉아있으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는데 살림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일을 부러 만들어했다. 사람이 공주처럼 커야 공주처럼 사는 건데공주처럼 클 수 있는데도 그렇게 안 해서 온갖 고생을 했어. 동리에서 제법 소문이 날 만큼 길쌈과 요리 실력이 뛰어났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싫다며 들어오는 선을 다 마다해 21살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가족이 친척집에 일 도와주러 가자는 거짓말로 할머니를 데리고 나갔고, 고모 집에 도착해 보니 선볼 남자가 이미 와 있었다고 했다. 역시나 할머니는 보지 않겠다고 방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남자가 방안에 불쑥 들어와서 얼굴을 확인했는지 어쨌는지. 여하간 몰래 넘어다 본 그 남자의 얼굴도 꽤나 준수했다고 했다. 결국 어머님도 잘생긴 얼굴 보고 마음에 들어서 결혼하신 거잖아요! 할아버지 제사 때마다 반복되는 스토리에 엄마는 언젠가부터 장난 섞인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항상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아니긴, 내가 봐도 맞다 뭘.

 

  할아버지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다혈질이어서 밥상이 제때 나오지 않거나 취향에 맞는 매운 고추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밥상을 엎었다. 애를 들쳐 업고 고추를 사러 뛰어갔던 할머니는 꼭 엎어진 밥상의 증거인 찌그러진 밥그릇에다가 할아버지 제삿밥을 푼다. 할아버지는 바람도 엄청 폈다. 사진을 보면 얼굴도 잘생기신 게 맞고, 아들의 성격으로 보아 감성적인 면모도 갖추었을 것이 분명하다. 할머니는 애를 배고 나타난 처녀가 애를 낳겠다고 해서 아내에 자식도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해주고 돈도 쥐어주며 병원에 보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전혀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그분의 잘못은 정말이지 너무나 명확하지만 어쩐지 두 분이 요즘 세상에 태어나셨더라면 결혼 자체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말이지 성격 차이가 컸다. 할머니에겐 밥상 엎는 남편이었던 할아버지가 불륜 관계였던 여자들에겐 어떤 남자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여자분 중 누군가가 세상에 그 좋은 사람이 죽었냐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떻게 해줬는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더라, 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씁쓸할까 아니면 그쯤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렇게 안 맞는 두 사람이 어떻게 애를 다섯이나 낳았는지 요즘 젊은이인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땐 다들 그렇게 살았다니 뭐. 그러나 두 분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글쎄, 유추해 보건데 가족들이 많이 슬퍼하지는 않았을 듯싶다. 남편이 있을때나 없을때나 다섯 아이를 혼자 건사해야 했던 할머니는 솜씨를 살려 식당에서 일했다. 젊어서 사서 고생했더니 일할 운명이 되어버렸다고 늘 말하는 할머니는 식당 부엌일로만은 안 되었던지 쌀장사를 시작했다. 일단 쌀이니까 자식들을 굶기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 덕인지 아빠나 아빠의 형제들에게서 밥을 굶었다는 추억담은 들어본 일이 없다. 가난하긴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밥은 열심히 먹였지만 할머니는 살가운 어머니는 못됐다. 할머니는 본래도 성격이 무뚝뚝한 편인데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으니 어쩔 수 없었을 게다. 그래도 사랑이 없던 것은 아니어서 일하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자식들을 길렀다. 속옷까지 다려 주었다니 말 다했지. 상상도 안가는 부지런함에 혀가 절로 내둘러진다.

 

  다섯 자식 중 큰 딸과 큰 아들은 대학에 보낼 수 없었지만, 아래 세 명은 큰 형의 희생 덕에 대학 교육도 마쳤다. 묵묵한 큰 아들은 집안과 동생을 위해 성실하게 젊은 날을 흘려보냈다. 둘째 아들, 그러니까 나의 아빠는 서울까지 올라가서 대학을 다녔다. 하숙집 주인의 손주를 안고 있는 젊은 아빠의 사진을 보면 양말 바닥이 다 해져 아주 제대로 시스루 양말인데, 어쩐지 그의 형도 저것보다 좋은 양말을 신었을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애잔하다. 할머니와 큰아빠는 그렇게 집안을 유지했다.

 

  50대가 된 할머니는 하나 둘 자식을 결혼시켰다. 며느리를 받게 된 할머니는 욕심이 가득 찼던지 며느리들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다. 초면에 예단 비용이 든 봉투를 바닥에 던졌고, 자신은 해줄 게 없으면서 며느리들의 형편에는 부아를 냈다. 물론 큰 아들 내외와 둘째 아들 내외는 결혼 후에도 오래도록 할머니의 빚을 갚아야 했다.

 

  차례로 다섯 남매를 결혼시킨 할머니에게 태어난 지 한 달 된 서울의 갓난쟁이 손주가 맡겨졌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형편의 둘째 아들이 외가에 차마 두 명의 양육을 부탁할 수 없어 둘째만 친가로 보낸 것이다. 그게 나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아이를 돌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할머니는 오래도록 나와 함께했던 그때를 행복했던 시절이라 추억했다. 안고 업고 손을 잡아가며 키운 2년 반이 지나고, 형편이 조금 나아진 아들 내외가 아이를 데려갔다.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 혼자 과자 세 봉지를 먹어치웠다. 엄마는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놀래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는데 글쎄, 부산에서는 늘 그렇게 잘 먹었다는 대답만 들었단다. 할머니의 손주를 향한 사랑은 내가 서울로 올라간 이후에도 오래오래 넘쳤다.

 

  내가 떠난 이후 할머니는 쭉 혼자 살았다. 노인 대학이나 경로당에 다니려면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는데 그러기 싫다며 늘 홀로 시간을 보냈다. 1년에 10번이나 되는 제사를 준비하는 것이 할머니의 소일거리였다. 할머니는 특히 모든 자식과 손주가 찾아오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손주들에게 많은 용돈을 주기 위해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아끼고 또 아꼈고 가족들이 찾아오면 밥솥이 터져 나갈 만큼 밥을 지었다. 그렇게 터질 듯 한 할머니의 사랑에도 며느리는 절대 포함되지 못해서, 카드 게임을 하던 아들이 낮잠을 자고 싶으면 부엌에서 일하던 며느리는 달려가 이불을 깔아주어야만 만족했다. 남녀차별이 유별한 할머니였지만 이상하게 손주들은 성별로 차별하지 않았다. 딸만 둘 낳은 며느리에게 아들을 또 낳으라 하지 않은 걸 보면 남녀차별이 아니라 그냥 며느리차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때문인지, 여자인 나도 명절에 엄마를 도울 수 없어서 나이가 들어가는 큰엄마와 엄마와 작은엄마가 차려내는 밥상을 받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 됐다. 할머니의 불호령보다는 셋이 일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엄마의 선택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무기력했다.

 

  할머니는 점점 기운이 빠졌다. 그렇게 요리 솜씨가 좋았는데 어쩐지 맛이 자꾸 바뀌었다. 할머니는 심장 혈관도 오그라들었다. 오래 걸으면 숨이 차던 게 그냥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 왔다. 기운이 빠지면서 할머니는 며느리들의 전화에 고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만 며느리들은 상처받은 세월이 너무 오래라 그 말에 감동을 받을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할머니는 늙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릇의 때를 미처 닦지 못하게 하는 잘 안 보이는 눈이라던가 자식들의 도착 시간을 깜빡거리게 하는 짧아지는 기억력은 할머니의 부끄러움이 되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정도는 젊은이들도 잊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다. 마음이 상하는 할머니 앞에서는 청소도 마음껏 할 수 없었다. 며느리들은 몰래몰래 물때와 기름때를 닦았다.

 

  할머니는 이제 1주일에 한 번 가던 큰 딸의 집을 방문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할머니 옆에서 잠을 자면 쌕쌕 쌕쌕 가뿐 숨을 쉬는 할머니가 느껴진다. 좋아하던 고기 요리도 해먹지 않고 청소하는 모습을 봐도 말리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푸념할 수도 없게 잊은 것조차 잊어버린다. 할머니가 더 이상 늙음을 한탄하지 않는 지금에 와서야 나는 할머니의 늙음을 절절히 느낀다. 붙잡을 수 없게 할머니가 떠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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