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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19.7.17. 송곳

by 푸휴푸퓨 2019.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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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젯밤, 일기장을 들척이다가 마음을 송곳에 찔렸다. 너무 아팠다.

 

  2017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찾아볼 일이 있어 일기장을 꺼냈다. 여행 일기는 읽기만 해도 그 시간이 퐁퐁 떠올랐다. 여행지에서의 평온함, 신남, 짜증까지도 그대로 묻어나왔는데 전부 다 되새기니 좋았다. 앞으로도 꼼꼼히 기록하리라.

 

  그러다 부산에 다녀온 일기를 발견했다. 여행 직후의 일이었다. 명절마다 할머니 집에 꼭 가는 집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긴 추석 기간을 이용해 오카야마에 다녀왔었다. 부모님은 추석날 전화를 하라며 보내주셨는데, 멀리 계신 할머니께는 그저 통보만 했다. 이번엔 못 가요 할머니. 추석 지나고 주말에 한 번 갈게.

 

  여행 일기 속에는 짜증이 불뚝 난 내가 있었다. 아니 말이야. 추석날에 한번만 전화하면 되는 거지 왜 아빠는 두 번이나 하라고 하는 거야. 인사하고 나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평소 같은 전화를 했겠고, 혼자 한 번 가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해 드렸겠지. 그래봐야 잠깐이었다. 나는 금방 여행 감성으로 돌아갔다.

 

  돌아와서 몇 주 이따 부산에 갔었다. 다녀왔단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있던 방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을 잊었는데, 일기에는 남아있었다. 일기를 읽으니 다시 생생히 기억이 돌아왔다.

 

  할머니 집에 가기 전 울산에 들렀다. 잘 보지 못하는 먼 지역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반, 할머니 집에 너무 일찍 가면 할 일이 없으니 시간을 보내고 가려는 마음이 반이었다.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저녁 시간에 맞춰 부산에 도착했다. 같이 먹을 치킨도 사고 달달한 주전부리도 사고 엄마가 주신 꿀도 들었다. 할머니는 엄청나게 반가워 하셨는데, 그러실 것이라 익히 예상하고 있는 바였다. 하이고 무겁게 꿀을 들고 왔냐며 반겨주셨다. 할머니, 그거 엄마가 챙겨준 거라니까. 엄마 얘기는 보통 할머니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래도 꼭 한 번씩 짚어드렸다.

 

  미리 전화 드리긴 했지만 명절이 아니었던지라 할머니가 집 청소를 할 넉넉한 시간은 없었다. 내가 알던 것보다 할머니 집은 약간 더 더러웠다. 원체 깔끔하신 성격이신 탓에 물건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화장실의 머리카락, 머리카락, 머리카락. 할머니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을 작은 낱알들이었다. 물때와 함께 싹 쓸어내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내가 일하는 걸 원치 않았다. 본인의 집이 더러운 걸 부끄러워도 하셨고. 눈 질끈 감고 모른 척 손대지 않았다. 좀 더 편하게 생각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도와드렸을 텐데.

 

  저녁을 먹으려 둘러보니 역시나 할머니는 밥으로 죽 같은 걸 끓여두셨다. 혼자 계시면 늘 그런 것을 드셨다. 달달한 치킨을 참 좋아하셨는데 남사스러워서 치킨 가게에 혼자 들어가시질 못했다. 그래서 1년에 10번 가까이 되는 제사 때 사용한 음식을 얼려두었다 꺼내 드셨다. 그게 맛이 있을 리 없지. 혼자 계신 할머니의 식단은 모든 가족의 걱정거리였지만 난 또 모른 척 수선만 떨었다. 할머니 우리 이거 말고 치킨 먹자~ 할머니는 양념치킨의 달달한 소스를 참 좋아하셨다. 다 먹고 저녁거리를 치우는 나에게 또 미안해 하셨지만 그걸 안할 순 없었다. 할머니! 내가 할머니보다 훨씬 힘이 세다니까! 그런 말을 하면 할머니는 그냥 웃고 마신다.

 

  저녁 드라마를 챙겨보고 자려 누웠는데 할머니의 숨소리가 몹시 가빴다. 할머니는 협심증 때문에 심장 혈관이 많이 막힌 상태였다. 숨소리는 매 명절마다 점점 더 가빠졌는데, 낮보다 밤에 누우면 그게 훨씬 잘 느껴졌다. 항상 바로 옆에서 자는 사람이 나라서 어쩌면 나만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어른들 모두가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우린 다른 많은 것들을 모른 척 했으니까. 숨이 가쁜 할머니가 혹시 숨을 멈추실까 잠깐 무서워했지만 자세히 생각하진 않았다. 눕기 전 창문을 꼭꼭 닫고, 커텐도 꼭꼭 닫았다. 할머니는 꼭 방문과 창문, 커텐을 닫고 주무셨다. 문을 열어두면 집 전체에서 혼자 있는 거지만, 문을 닫으면 방 안에서 혼자 있는 거라 그랬다. 할머니에겐 집이 너무 넓었다. 외로움은 훨씬 더 넓었을 거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이미 할머니는 일어나 계셨다. 아니 솔직히 일어나 계셨다고 추측만 한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 내용이 일기장에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상을 차려주셨다. 계란말이, 미역국, 커다란 밥그릇에 가득한 잡곡밥이었다.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한 밥상이었지. 밥은 평소에 먹던 것보다 네 배는 많아 보였지만, 나는 밥과 반찬을 꾸역꾸역 전부 다 비워냈다. 나는 할머니의 음식 맛이 좋음에 홀로 감탄하면서 매번 제사(차례) 음식 대신 이런 일상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그걸 차리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기보다는 이렇게 차려 주시는 게 더 마음에 좋으실 테니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밥을 와구와구 먹으면서 내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할머니는 계속 먹을 게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대체 이게 없는 거면 난 어쩌란 말이야, 정작 본인은 얼마 드시지 않았으면서. 그러니까 할머니는 얼마 드시지 않았다고 일기에 적혀 있었다. 그랬을 것이다. 할머니는 2017년부터,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음식을 얼마 드시지 못했다. 그래서 2017년의 나는 유난히 못 드신다고 느낀 게 아니라 늘 그렇듯 얼마 드시지 않았다고 적어놓았다. 나의 오만한 무심함이 넘쳤다.

 

  할머니는 나를 역까지 데려다주고 싶어 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같이 택시를 타고 역까지 가고 싶어 하셨다. 그런데 역은 내가 팔랑팔랑 걸어가면 넉넉히 15분이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게다가 딱 걷기 좋은 가을이었잖아. 내가 무심코 할머니 택시를 타?’ 하고 놀라자 할머니는 내 놀라움을 눈치 채지 못하고 당연히 탄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할머니는 15분 동안 걷기도 힘에 겹구나. 속이 상했다. 물론, 모른 척 했지.

 

  그런데 문제는 현관문이었다.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노래가 띠리리 나왔다. 나는 가기 전 마지막으로 그것까지 바꿔드리고 싶어서 얼른 건전지를 사왔다. 그런데 건전지를 덮어놓은 덮개가 잘 열리지 않았다. 내가 끝까지 했으면 좋았을 걸, 할머니는 본인이 하시겠다며 작은 나사를 잡고 힘겹게 열었다. 그까짓 것을 여는데 세상에, 할머니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숨이 가쁜 할머니가 힘을 좀 쓰셔서 숨이 더 가빠졌다고만 생각했다. 숨은 금방 잦아들었다.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할머니가 멀리 나오시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면 할머니는 숨이 잦아들었어도 가슴 속 심장은 엄청 아팠던 거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으면서 내가 할머니는 계시라고, 혼자 간다고 하자 저항 없이 그러마 했다. 할머니는 역까지 나와 도저히 갈 수가 없었겠지. 어디가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괜찮다고, 별로 멀지도 않다고 웃으며 떠났다. 나름 할머니 마음을 생각한다며 억지로 태워주는 택시도 탔다. 이 짧은 거리를 타다니 돈이 아깝군, 생각하면서.

 

  기억은 거기까지다. 나는 그 이후 혼자 부산을 찾아간 적이 없다. 명절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뭐 대단한 여행을 한다고 할머니의 서운함과 바꿔가며 나라를 나갈까 싶었다. 나는 당당했고 또 무심했다. 할머니는 볼 때마다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쇠약해지고 있었다. 그 평범한 밥상이 사무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나를 찔러버릴 지는 더 몰랐어. 헤어질 때 한 번 안아드리기나 할걸. 전주에서 서울로 나와도 할 일 없던 그 시절에 몇 번 더 찾아 뵐 수도 있었을 텐데. 할머니가 왜 그렇게 밥을 못 먹는지 더 꼬치꼬치 물어볼걸. 웃긴 이야기를 더 많이 하거나 전화라도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이따위 일기나 써 놨구나.

 

  다음 명절, 그러니까 설날에 갔을 때 내가 가져갔던 그 꿀은 거의 그대로 있었다. 우리 은녀이가 가져온 긴데 아끼야지! 그러고선 나에게 떡에 찍어먹으라며 듬뿍 꺼내주셨다. 그 꿀은 아직도 할머니 집에 있을까. 혹시 그 사이에 다 드셨을까. 단 것을 좋아하고 몸에 좋은 것도 좋아하는 할머니가 그 꿀이 입에 맞지 않아 먹지 않았을 리는 없다. 먹지 못했다면 아끼셨거나 혹은 그마저도 잊으셨던 것인데 나는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발 다 드셨으면 좋겠다. 제발 다 드셨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제발이란 말을 함부로 갖다 붙인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지만 꿀을 다 드셨는지 확인하러 갈 용기는 없다. 나는 그 집에 다시는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주말에 부산에 간다. 할머니의 49제가 지나면 이제 정말 다 끝나는 걸까. 할머니가 생각나서 괴로우면 빠르게 광명진언을 외운다. 이게 정말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죄책감을 덜지 않으면 내가 살 수가 없다. 내가 외면했던 수많은 할머니가 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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