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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Book Review] 비노동사회를 사는 청년, 니트 - 이충한

by 푸휴푸퓨 2020.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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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 유입 경로를 늘 살펴본다. 절대적 유입량은 적지만 무엇이 검색의 앞머리에 있는지, 어느 주제가 요즘 관심사가 되었는지 보기 즐겁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꽤나 오래전에 올렸던 책이 유입 경로로 등장한다. '빈둥빈둥 당당하게 니트족으로 사는 법(2015.8.30.)'. 막상 올렸던 2015년에는 전혀 유입 인자가 되지 못했는데 어쩐지 작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해당 글이 클릭된다. 이에 니트란 무엇인지 한 번 제대로 알아보고 정리해두기로 결심했다('빈둥빈둥' 저 책은 한 개인의 일상이라 객관적 정리라기엔 무리가 있거든).  이번 책 '비노동사회를 사는 청년, 니트'를 읽고 니트의 이미지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소감을 남긴다.

 

  니트NEET는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를 의미한다. 이에 저자는 "니트는 정의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니트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다들 열심히 물 아래에서 갈퀴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니트란 말을 종종 쓰면서도 정의를 들여다보지 않았는데, 정의 속에 사회 구성원의 기본 요건이 무엇인지 이리 정확히 들어있는 단어였다니.

 

  사실 니트 개념 속에는 교육을 통해 일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하는, 근대 고용 사회적 노동자 주체를 당연시하는 시선이 은연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교육-피고용 상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시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거다. 지나간 정도가 아니지. 졸업하자마자 취업한 한국 젊은이는 멸종 위기라 본다. 

 

  '고용 중심 경제 시스템'이 더 이상 예전처럼 기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 영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앞으로 도래할 '탈고용 경제 체제post employment economy system'에서는 노동하는 사람보다 노동하지 않거나 못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 니트는 어쩌면 이러한 '비노동사회'를 남보다 조금 먼저 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청년 실업이 커다란 파도처럼 보이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닥쳐올 진짜 쓰나미는 청년의 비노동이다. (중략)

  따라서 니트는 소수자 문제이면서 동시에 소수자 문제가 아니라는 이중성을 직면하고, 니트를 청년 문제의 일부분으로 접근하기보다 청년 문제 일반으로 확대해야만 핵심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하지 않는 비노동 상태'에 대한 전제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취준생에게 "넌 언제 취업하니?"와 같은 질문을 막힘없이 던지던 시기를 지나 이제 그런 질문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취업하지 못하는 이유가 개인에 있지 않음을 막연히 모두가 인정한다는 방증이다. 그럼 이제 청년들에게 민망한 질문을 피하고 적당히 외면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사회 상황을 타개하려 해야 하지 않나.

 

  책에는 니트족 5명의 인터뷰가 들어있다. 저자가 밝히길 본인이 중산층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인터뷰 대상자가 대다수 중산층 출신이라며 인터뷰의 한계를 인정한다. 나는 중산층이기때문에 니트족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니트가 되고싶지만 당장 먹고살 길이 없어 아득바득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있는 이가 이런 인터뷰를 할 여유는 없을테니까. 인터뷰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니트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란 말로, 예민한 부적응자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함을 먼저 알아채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인터뷰이가 견디지 못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뒤늦게 발생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해당 집단의 문제일 테다.

 

  니트 상태이건 아니건,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들은 비슷한 배제의 구조 안에 놓여 있다. 니트는 전면적인 배제를, 다른 청년들은 국지적인 배제를 겪을 뿐이다.

(중략) 나는 니트라는 개념에 '성과사회의 압박으로부터 소진되어 버린 사람'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포함시켜야 하며, 이것이 후기 근대의 보편적 노동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그리고 자기 계발적 열정 노동자와 고립형 니트의 모습이 거울 관계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회의 압박을 견디며 열심히 자기 계발하던 개인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면 니트가 된다. 그러니 과거의 객관적 성취에 비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주관적 성취가 낮은 점은 니트의 큰 원인이 된다. 경제 발전기의 청년은 고등 교육 후 쉽게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의 영역으로 들어서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이는 한국 니트가 방에 틀어박히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일본과 달리 한국 청년들은 부모님에게 '뭐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은둔형 니트가 아니라 활동형 니트가 된다.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인정을 받고 싶은데 그러려면 자격을 획득해야 하고, 거기에는 돈이 들어가는데 확신이 서지 않으니 돈을 투자하기도 힘들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작은 일이라도 일단 시작해야 하는데 받는 돈이 적으면 '내가 그것보다는 자격을 갖춘 사람인데 인정을 못 받는다'는 느낌이 드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는 내가 지켜본 많은 고학력 니트들이 가지는 공통점이다. 과거의 객관적 성취가 현재의 주관적 성취감을 방해하고, 결국 미래를 향해 걸어가지 못하게 만든다.

   노동의 가치가 무너진 세상에서 노동이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인정할만한 노동처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저자는 니트를 개인 심리로 파악하면 무기력하기때문에 니트가 된다고 보는 오류에 빠진다며 무기력은 니트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청년들은 반복적 (노력과 반복적 실패를 통한) 비활성화 끝에 비노동화하는 방향으로 사회화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이를 단순히 과노동에 대한 바감이나 탈노동에 대한 욕망이라 볼 수는 없다. 그보다는 지나친 활성화에 대한 압력의 끝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비활성화에 대한 열망에 가깝다. 비활성화에 대한 열망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회는 쓸모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행사하는데, 그 쓸모와 의미에 대한 맥락은 함께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명목상 쓸모 있고 의미 있는 일들이 실제로는 쓸모 없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 그러다 보니 애초부터 쓸모 없고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만이 말이 되는, 혹은 투입 대비 효율적인 상황이 된다.

  니트화가 무기력한 개인들의 문제가 아님을 이제 인정한다면 이제는 사회가 이들을 어찌 감싸 안을 지 고민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건 네가 노동자로써 성취하지 못한다 해도 사회 안에서 네 존재는 의미가 있다는 신뢰이겠다. 

 

소규모 부족들뿐만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와 도시 단위의 커뮤니티까지, 이 신뢰의 그물망은 촘촘하게 방사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밀려나도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는다'는 신뢰를 주는 것은 일터에서의 파편화를 줄일 수 있는 궁극적 해법이기도 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노오력형 니트'처럼 곤란함을 겪으면서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단속적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풀어 감으로써 이 사회의 체질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노동 공급량이 수요량보다 많은 지금 상태에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저자는 무조건적으로 받고 주는 경험이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기에 효과적이고, 이에 기본소득 보장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노동이 넘치는 세상에서 사회적 힘이 가장 약한 청년들이 먼저 무너져내리고 있다. 이들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행기와 전환기에 틈새 시기를 갖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시간의 틈을 통해 자신의 틈을 되돌어보는 것은 스스로의 삶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기회가 된다. 통일성이란 다시 말하면 자신의 생애를 '말이 되도록' 기획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하나로 모으고 싶어 하는, 매우 보편적이고 강렬한 욕망이다.

  천천히 쉬어가며 차 한 잔 마시고 저녁을 즐길 시간이 있는 세상을 사실은 우리 모두가 꿈꾸고 있다. 1970~80년대에는 모두가 일해서 성장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기에 쉼은 사치였지만 이제는 의지만 있다면 쉼을 보장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기까지 약 1년이 걸렸다. 이 시간은 내게 두려움과 고통으로 남아있는데 이대로 사회에서 유리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집에서 밥만 축내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기분이 제일 심화되었을 시기에 난 면접을 위해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충고에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내 자신에 대한 절망을 더해 하루에 딱 한 끼만을 먹었다. 그 시간 외에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니트족이라 천명하지 않았을 뿐 당시의 내가 바로 니트였다. 그리고 그런 시간을 나의 친구들은 누구나 보내었는데, 왜 그 기간을 우리의 탓만으로 돌렸는지 모르겠다. 알면서 모른 척 하는 걸지도 모르지. 우리의 탓이 아니라면 누구의 탓인지 물을 곳도 없었으니까.

 

이제 우리 모두는 '노동이 존재의 이유라는 대전제'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내 노동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해 주고 나의 가치를 보증한다는 생각은 지나간 시대의 덧없는 욕망이 되었다. 노동하지 않더라도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의 가치가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용이 당연하지 않게 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존재하고 생각하고 활동할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니트족이라 말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니트일기'를 찾았다(@nicetoneet). 찬찬히 둘러 보았는데, 사회 현상으로써의 니트족을 이 책에서 익힌 뒤 이 계정을 살펴보면 실제 니트의 사례를 이해하기 좋겠다. 이 계정주도 전혀 게으르지 않음은 물론이다. 니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란 편견은 이제 거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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