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덕분에 상당히 게을러졌다. 출근 외의 유의미한 활동은 전혀 하지 않는 지경으로 취미도 소소한 재미도 사라졌다. 시간을 보내고 보내고 보내다 보내는 시간이 숨을 옥죄는 기분이 들 때쯤 발견한 책이다. 작가는 철학과 교수인데, 교수가 일을 미루면 고통받는 위치에서 일하는 나는 가끔 발끈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주 즐겁게 읽었다. 미루는 사람의 성격을 유쾌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미루는 사람의 성격이 대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마감 시한이 촉박한 일을 중요한 일로 간주하기가 쉽다. (부지런쟁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마감 시한이 정말 촉박하게 느껴지는 건 정해진 날짜가 1-2주쯤 지난 뒤부터다.)
이보세요. 마감을 잘 지키는 건 부지런쟁이가 아니라 그냥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 아닙니까? 작가의 톤은 시종일관 미루는 사람을 당당하게(라고 쓰고 뻔뻔하게라고 읽는다) 감싸주고 있지만 무작정 미워할 수는 없다. 그는 '효율적인' 미루기쟁이를 지향한다. 절대 미뤄서는 안 되는 일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는 셈이다. 다만 '굳이' 먼저 하지도 않을 뿐.
수직형 정리자들은 한 시간이나 하루 뒤, 혹은 1주일 뒤에 사용할 자료를 보관할 때 문서 보관함을 이용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중략)
나는 수평형 정리자다. 언제든 시선이 닿으면 다시 일을 시작하기 쉽도록 작업 중인 사물을 내 앞의 평면에 펼쳐 놓는 걸 좋아한다.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그런 일도 있기는 했지만) 다시 보는 일이 없어서다. 나는 문서 보관함을 열고 절반쯤 끝낸 프로젝트를 꺼내서 하던 일을 재개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이다.
본투비 수직형 정리자인 나는 어수선한 책상은 바라만 보아도 정리해주고 싶다. 짐이 쌓여 있는 게 더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구인의 기분이다(그들에겐 내가 외계인이겠다). 하지만 눈앞에 없으면 그 일을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는 말에 어쩐지 납득은 되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작가는 같은 미루기쟁이에게 일을 망치지 않으면서 괴롭지도 않을 만큼 효율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과업 자르기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직면한 과업을 분류한다. 미루기쟁이는 대체로 모든 과업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완벽히 수행할 여유가 없으니 일을 미루고, 이게 반복되면 마감이 넘어간다. 그러니 미루기쟁이는 가장 먼저 주어진 과업을 완벽해야 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지 잘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일을 짧은 단위로 잘게 쪼갠다. 크게 보면 큰일이지만 작게 보면 별 일도 아니다. 작은 일의 목록에서 하나씩 줄을 그어 나가다 보면 어느샌가 일은 끝난다. 성취감으로 충만한 본인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때로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조금 기다리다 보면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유용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중략) 뿐만 아니라 일을 미룬 덕분에, 나는 완벽한 작업을 요하지 않는 일에 대해 완벽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잘 미루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업무가 주어지면 빨리 잘 끝내고 싶어 안달이 난다. 꼭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렇다. 여유 없이 한 문제에 몰두해서 생각을 거듭하다 성급히 마무리짓고 나면 그제서야 다른 생각이 난다. 조금만 쉼표를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미루기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의아했지만 읽고 나니 아주 산뜻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결국 행복을 바라며 산다. 빡빡한 사람이 있으면 여유로운 사람이 있고 조급증이 있으면 게으름도 있는 법. 센스가 넘치는 작가를 한 명 더 알게 되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체계적인 미루기쟁이는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인간은 아닐지 몰라도,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자유로이 발산하게 내버려두면 체계적인 업무 습관을 고수할 경우에 놓쳤을지 모를 온갖 종류의 일들을 성취해낼 잠재성 있는 인간이다. 끝마친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를 칭찬해 주자. 할 일 목록, 알람시계 등, 여러 가지 방법들을 활용해 주변 환경에 제약을 걸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맞지 않게 협력자를 곁에 두자.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인생을 즐기자.
추신
해외 대학 도서관의 전산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업계 관계자로써) 호기심이 일었던 장면. 현재 우리 대학 도서관의 프록시 서버 설정은 클릭 한 번으로 끝나고 이것은 10년 전 내가 모교에 입학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루기의 기술'은 2012년에 출간됐다.
예를 들면 나는 프록시 서버를 설정했다. 동료 교수가 어느 시점에 하소연하듯 말한다. "집에서 JSTOR에 접근을 하고 싶은데 프록시 서버가 설정돼 있지 않아." "아!" 나는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나는 몇 주 전에 설정해 놓았지. 아주 잘 돌아간다네." "자네는 대체 무슨 수로 그럴 시간까지 찾아내는 거야?" 동료 교수는 존경스럽다는 듯 묻는다. 대답 대신 나는 우쭐한 표정을 짓는다.
작가의 대학은 대체 프록시 설정을 어떻게 하길래 의기양양한 기분까지 느끼는지 알 수 없다. 과정이 굉장히 복잡하거나, 작가가 클릭 한 번에도 어마어마한 자긍심을 느끼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허허. 대학도서관 화이팅. 전산 담당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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