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귀갓길에 충동적으로 반지를 샀다. 충동적이기도 하고, 충동적이 아니기도 하다. 3월부터 3달간 이어진 도서관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나에게 셀프 선물을 하나 해 줄 참이었으나 귀걸이냐 반지냐 아직 종목을 결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금액과 시기 또한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것들 전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확, 반지를 샀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막 써도 될 금액은 아닌 정도의 값을 치르고서.
그리고서 오늘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의 공연 티켓 오픈 소식을 들었다. 앞뒤 재지 않고, 가격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친구에게 예매를 부탁했다. 안 갈 수가 없잖아!? 하면서 일단 말은 했는데 아, 반지 값에 공연 값에.. 점점 여행 예산이 작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푼을 아쉬워하며 모아야 할 시기에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니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하면서 이 정도 누리는 것은 괜찮다는 환청이 들리기도 했다. 월급을 모두 아내에게 바치고 쪼들리는 용돈으로 사는 남편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갑자기 공감도 해봤다.
낮에 커다란 반지를 처음으로 개봉해 떡하니 끼고 아르바이트에 갔다. 반지를 끼고 있는 내 손을 보노라니 아르바이트 많이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씀씀이만 커졌다 싶기도 하고, 그래도 열심히 사는데 셀프 선물 일찍 좀 주면 어때? 싶기도 했다. 아마 도서관 아르바이트 끝나는 날에는 구실이 없으니 선물을 살 수 없어 많이 아쉬울 것이야. 이 지출은 어디서 감당하지. 쿨하고 싶어서 질러봤는데 역시나 쿨하지 못했는데 쿨하고 싶긴 한데 근데 근데...... 그래서 어쨌든, 내가 계속 쿨하지만 걱정스러운 이 소비의 값을 어디서 메꾸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옆 부서 언니가 다가왔다. 언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이 아닌가 싶지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 어찌 되었건 그 언니가 은근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다가왔고, 말을 꺼냈고,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고 부탁하기에 새로 파견 온 직원도 있겠다 해서 받아들였는데. 아뿔싸. 내가 받아들였단 소식을 듣고 우리 부서 언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파견 온 사람과 아르바이트생의 일은 전혀 관련이 없다나. 나는 내가 그렇게 외면하던 지난 알바생의 고난을 그대로 뒤집어쓰게 되었다. 우리 부서 언니가 싫어할 줄 알았더라면 싫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얕은 거짓말 해봐야 금방 들통날 것 같아 솔직하게 시간이 된다 말했더니만. 하하하. 내가 웃는 게 웃는게 아니야.
오전에 시간이 있었지만 체력 단련 따위 하지 않았다. 숨풍 숨풍 돈을 잘 쓰고 있던 차에 아르바이트 급여를 더 받게 되었으니 구멍을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핑곗김에 다음 달에 아르바이트 그만두겠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더욱 재게 몸을 놀려서 저녁에 운동하면 되고, 돈 많이 벌면 좋지 뭐, 위안을 한다. 위안을 한다. 위안이 안되는데 위안을 한다. 내가 왜 긍정의 답을 내뱉었나 생각해 본다.
다 반지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비싼 반지를 사고 나서 줄어드는 여행 경비에 대한 걱정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비단 반지뿐이 아니라 요즈음 나의 씀씀이는 점점 커지고 있다. 지루한 아르바이트 일상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책 몇 권, DVD 몇 개, 그리고 자유로운 쇼핑뿐이라는 생각에서다. 택시도 막 탄다. 여유로운 도시민 코스프레하고 싶어서 늦장을 부린다. 그 모든 마음을 응축해 고난을 자처하는 나의 대답을 유도한 그것, 반지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
다음 주부터 나는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설 것이다. 민원 전화를 받아 온갖 욕도 먹을 것이고, 그렇게 듣기 싫었던 옆 부서 언니의 잔소리 및 고성도 고스란히 내가 다 받게 될 것이다. 공식적으로 두 부서 일을 모두 겸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되었으니 두 부서의 잡무를 내가 전부 처리해야 될 것은 너무 당연하다. 끝이 금방 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일단 시작은 한다. 시작은 하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끝내고 싶지만 그래도 시작은 한다.
휴학이라는 것이 녹록지만은 않다. 하지만 열심히 살겠다 결심하고 시작했기에, 어떤 것을 탓하지도 않고 회피하지도 않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놈의 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이 악물고 달리고 있다. 그래,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하고 산다. 열심히 번 돈으로 2학기에 좀 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툴툴댈 수 없다. 조용히 화이팅을 한다. 화이팅. 게스트하우스 책을 더 열정적으로 읽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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