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부모님이 환갑이다. 환갑잔치를 할 건 아니지만 잘 챙겨드리고 싶긴 했다. 나름대로 예산을 생각해봤는데 이게 참, 턱없이 부족했다. 매년 1년 단위 저축계획을 세우는데 환갑 축하 계획을 넣지 않았다. 빠듯하게 저축을 해대니 대체 여유분이 없었다. 엄마가 스륵 보여준 엄마 친구 딸들의 멋진 축하 사진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저 아주머니는 어쩌라고 사진을 보내고 그래?
골머리를 앓다가 나에게 물어보았다. 돈이 아까운가? 돈이 아까운 건 아닌데 애초의 저축 계획을 지키지 못하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 계획이 중요한가? 사실 그냥 내가 혼자 세운 계획이지 그걸 지킨다고 특별히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는 만큼 해드리는게 어려운가? 받은 것도 많은데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축하해드리는 데 인색한 내가 마음에 드는가? 아니. 아니. 이렇게 못난 인간인게 너무 찌질했다. 그러게. 받을 땐 당연한 듯 쉽게 받으면서 드리기는 이렇게 어려워하는 게 말이 되나. 저축 계획만 내다버리면 됐다. 뭐가 중요하겠어.
요즘 내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도와주는 소비는 단연 PT다. 운동을 열심히 한 덕에 언니의 결혼식엔 조금이나마 살이 빠진 상태로 참석할 수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도 PT가 약속된 매주 2회만큼은 늘 땀을 비오듯 쏟아내며 운동을 했다. 내가 나를 통제하지 않으면 모든 게 풍족해도 결국 공허가 찾아오더라. 올해의 나는 우울하지 않으려면 절제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절제가 내게는 꽤나 어렵고, PT의 도움이 일상의 절제에 지대한 힘이 되어준다는 걸 느꼈다. PT를 끝내고 즐거운 허기를 느끼며 침대에 누우면 성취감이 차올랐다. 내게 PT는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도 저축 계획엔 없었는데 어떡하지. 악착같이 용돈을 줄여가며 PT를 등록했다. 등록할 때마다 한숨이 차올랐다.
우리는 각자의 우울을 품고 산다. 나는 공허하고 우울할 때면 집요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 어떤 상태인지 나를 알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이렇게 내가 제3자인양 스스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파악하는 걸 ‘메타인지’라고 부르더라). 그리고 필요한 것을 파악한다. 우울한 나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우울을 넘어갈 수 없음을 안다. 그렇게 파고들어 나온 답은 늘 정답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의 내게 필요한 건 저축 계획이었다. 나는 간결하고 단단한 나를 원했다. 많은 짐을 정리하고 취향을 바꿨다. 저축 계획을 지키다 못해 그 이상으로 뛰어넘으며 환희를 느꼈다.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만 늘 모으기만 하며 살 순 없다. 허튼 곳에 돈을 쓸 걱정은 안해도 될 만큼 나는 습관을 잘 길렀지. 이제 나는 잘 벌어서 필요한 곳에 잘 쓰는 나를 원한다. 내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데 돈을 써야지. 사는 게 별 게 없다. 결국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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