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한 미국 작가의 여행을 1965년 어느 번역가가 한국에 전했다. 멋진 관광지를 소개하거나 세련된 일화를 소개하지도 않지만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 1960년에 이미 할아버지였던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냐며 감탄한다. 멋지다.
존 스타인벡이 58세에 반려견 찰리와 함께 로시난테호(트럭)를 타고 미국을 일주한 여행기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생각과 여행하며 마주친 이들을 관찰한 이야기가 담겼다. 출판사에서 어느 정도 편집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절 백인 남성이라면 으레 지닐 법한 꼰대적 기질이나 마초 성향이 엿보이지 않아 읽기에 편안하다.
우리가 산더미처럼 내다 버리는 물건이 쓰는 물건보다 많다. 바로 이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의 생산이 가지는 대담무쌍한 풍요를 엿볼 수 있다. 쓰레기는 말하자면 그 지수指數와 같은 것이다. 차를 몰고 가면서 나는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으면 이렇게 버리는 물건을 하나하나 다 살려서 다른 데다 요긴하게 쓰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60년 전에도 미국은 쓰레기를 산처럼 내다 버렸다. 언제쯤이면 쓰레기는 풍요의 지수가 아니라 양심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이 끝 모를 쓰레기를 버려준 덕에 자본주의가 지금껏 성장했음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러면 불을 발견한 그 시점에서 오늘날 디트로이트 시에 있는 대공장의 용광로에 이르기까지는 또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이제 인간은 그 옛날보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더 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사고법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런 것이, 인간이란 사고하기에 앞서 먼저 감각과 언어를 가져야만 하며, 적어도 지금보다 과거에는 그러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어느 남자는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았는데 이제 자신은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작가는 인간이 사고법을 발전시키는 속도보다 세상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1960년대'에 말했다. 2020년대를 사는 나는 이제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박탈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원래 빨랐고, 나는 이해를 포기한 채 돈으로 그것들을 사는데 몰두한다.
나는 기후가 줄곧 좋은 데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 정말 따분한 일이다. 기후가 좋은 것보다는 날씨에 변화가 있는 쪽이 좋다. 언젠가 한번 멕시코의 쿠에르나바카에서 살아보았다. 그곳의 기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사람들이 여기를 떠날 때는 대개 알래스카로 간다. 메인 주하고도 또 북쪽인 어루스턱 군 사람들이 플로리다에 가서 얼마 동안이나 견딜 것인지.
흥미로웠던 부분. 나는 스스로 날씨에 민감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다가 영국에서의 1년을 보낸 후에야 날씨가 일상에 차지하는 힘을 알게 되었다. 선선한 가을 날씨가 1년 내내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지겹다니 새롭네. 배부른 소리라 일축할 수 없는 건 아이스브레이킹 용도로 날씨가 얼마나 자주 이용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날씨 타령은 때로 즐겁기까지 하다.
내가 여행하는 목적 중에는 지방 사람들의 악센트와 리듬, 어조 등을 듣자는 것도 들어 있었다. 보통 쓰는 말이라는 것은 단어나 문장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딜 가나 귀를 기울였다. 내가 받은 인상 같아서는 소위 사투리라는 것이 사라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없어진 게 아니라 없어져가고 있다는 말이다. 40년에 걸친 라디오 방송과 20년에 이르는 텔레비전 방송이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 게다. 속도는 느리지만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이 지방색이라는 것을 없애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통찰이 정확하다. 내 친척들만 해도 큰어머니/아버지와 비교해 사촌의 방언은 훨씬 강도가 약하다. 조그만 우리나라도 방언이 아직 사라지는 중인데 커다란 미국에서 방언의 소멸을 60년대부터 느낄 수 있었다니 대단하다. 혹은 매스커뮤니케이션 전의 방언은 같은 언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센 특징을 보였으려나. 여간해선 제주 방언을 알아듣기 어려운 것처럼.
늙으면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천성인가 보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놓이며 모든 변화를, 그중에도 특히 개선으로 향하는 변화에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굶주림 대신에 비만을 얻었다는 것, 또 굶주림도 비만도 다 우리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변화는 이미 결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앞으로 100년 또는 50년 후에 인간의 생활이나 사상이 어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 못하고 있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마 내가 지니고 있는 최고의 현명함일 게다. 딱한 것은, 변화를 막겠다고 정력을 소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잃는다는 것에서 고통을 느낄 뿐, 새로 얻는다는 기쁨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 부분을 읽고 이 책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 나이듦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는데(30대라니!), 시대와 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라는 말에 크게 동의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겸손한 노인이 좋다. 호기심을 잃지 않는 노인이 되고 싶다.
그런가하면 책 전체에는 스타인벡의 재치가 속속들이 스며있다.
또한 솔직하게 인정하는 바이지만 남의 비밀을 캐고 드는 나의 병은 고칠 수가 없다. 가리지 않은 창 앞을 지나게 되면 예외 없이 안을 들여다보고,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대화를 으레 엿듣는 것이다. 직업상 나는 인간을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자기를 정당화시킬 수도 또는 위엄을 피울 수도 있겠지마는, 역시 나는 그저 호기심이 강해서 그러는 것 같다.
작가는 고급 호텔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로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호텔에 도착한다. 작가를 로비에서 기다리게 둘 수 없었던 직원들은 고심 끝에 정리가 끝나지 않은 방을 일단 내어준다. 그 방에서 작가는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을 게 아니라 남아있는 지난 투숙자의 흔적을 살펴본다. 마치 내가 방 안에서 함께 보는 기분이다. 함께 이런저런 추리를 하다 재밌다며 웃으리라.
도시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신중을 기해서 코스를 잡으면 으레 엉망진창이 되고, 어쩌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구 방향을 잡아서 우물쭈물하다 보면 목적하는 대로 쉽게 나가게 된다.
생각해보면 작가는 내비게이션도 없이 지도만을 참고하며 그 큰 땅덩어리를 돌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말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여행에서 길을 잃는 게 마냥 불편한 일이지만은 않아서 괴로운 에피소드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효율성이야 내비게이션을 따를 수 없지만 예측하지 못한 재미는 지도를 볼 때 조금 더 있었더랬다(그런데 지도를 보던 시절엔 지도 없이 다니는 게 예측할 수 없어 재미있다고들 했던 기억이 나는군).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이것은 비겁한 태도였으리라. 그러나 더 비겁했던 것은 그 두려운 문제를 아예 부정해버리고 싶었던 나의 마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 살고 있었다. 그 공포 속의 생활을 영원한 생활 방식으로서 받아들여, 그것은 으레 그런 것이라고만 알고, 그것이 없어지리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것이었다. 런던의 하층민 아이들은 공습이 없어지니까 오히려 안정을 잃었다 한다. 익숙했던 생활 방식이 깨졌기 때문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백인 대치 상황을 살펴보며 작가가 남긴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차별을 외면하고 싶은 차별 받지 않는 쪽의 마음은 같구나. 없는 셈 치고 눈을 돌려버리고, 그냥 원래 그랬다고 생각하면 편리하다. 하지만 계속 그래서는 안된다는 걸 사실은 모두 안다. 그리하여 죄책감을 느끼고, 죄책감이 두려움보다 커진 사람은 문제 앞에 나서게 된다. 두렵다고 고백하는 지점부터 이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나는 주변의 차별에 얼마나 눈을 뜨고 있는가. 또 얼마간 부끄러웠다.
멋진 책이었는데 마무리까지 완벽하다. 1960년대의 번역가는 이미 세상을 등졌다(당시의 역자 후기도 읽기가 좋다). 재출간을 하고 싶던 출판사는 역자의 아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흔쾌히 긍정의 답을 준 그는 흥미로운 번역 후문을 전한다. 아버지는 조금의 의문이 있어도 스타인벡에 직접 편지를 써 뜻을 묻던 분이었다고. 멋진 작가와 존중할 줄 아는 역자 덕에 2020년대의 독자는 마음이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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