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의 사건
:: 언니가 결혼했다, 아빠가 현업에서 물러났다
언니가 결혼했다. 언니가 결혼을 했어! 가족의 큰 경사를 처음 겪어봐 낯설었지만 잘 지나갔다. 원래도 결혼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언니의 준비 과정을 보며 한층 싫어졌다. 지금의 남자친구와 결혼한다면 우리는 스몰 웨딩을 하자며 꾸준히 다짐하지만 글쎄, 스몰 웨딩은 그것대로 힘듦이 있겠지.
결혼식의 화려함보다는 적당히 친해진 잔잔한 익숙함이 좋다. 결혼식 이후 형부와 세 번을 더 만났다. 형부는 귀엽고 무던한 좋은 사람이었고 아주 조금 친해졌다. 언니의 시골집엔 재미난 물건이 많아서 집 밖으로 굳이 나갈 필요가 없어 보였다.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지만 결혼해서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는) 집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2월이 되어 아빠가 현업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예 퇴사는 아니고 자리가 옮겨진다네. 기술직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의 새로운 일상이 어떻게 펼쳐질지, 그 안에서 나는 또 어떻게 적응할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아빠가 은퇴 라이프에 연착륙했으면 한다.
2. 올해의 좋은 습관
:: To do List로 주말에 할 일 체크하기
평일에 해치우기 귀찮은 집안일은 주말로 미룬다. 하루 온종일 집에만 있는 주말이 되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번다하게 할 일은 많은데 하나하나 기억하기 어려운 단편적인 일들. 그러면 문득 아차! 하는 순간이 오고 일이 많다는 스트레스가 쌓였다.
회사에서는 첫 회사 입사 첫 날부터 할 일 목록을 꾸준히 만들었지만 집에서는 왜인지 그렇게 할 생각을 못했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잡다한 모든 일을 체크박스 리스트로 만들어 체크했더니 마음도 편하고 성취감이 높았다. 집안일도 업무로구나! 어쩌면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마음이었던 게 이제는 한몫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변해 업무 시스템을 도입할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도 덜고, 해야 할 일을 미처 빼놓지도 않고, 써버리고 싶었던 작은 메모장 채우기는 덤이다. 빠르게 목록을 해치우고 나서 침대에 누워 컴퓨터로 영상을 보면 그렇게 편한 하루가 없다. 행복한 주말 루틴의 좋은 완성이 됐다.
3. 올해의 음식
:: 소비뇽 블랑
친구의 집에서 처음 Cloudy Bay를 마신 건 작년이었다. 와인은 쓰고 떫은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상큼한 맛이 있어? 와인을 내어준 친구는 이름에 '소비뇽 블랑'이 들어가면 대체로 성공할 것이란 팁을 줬고, 우리는 함께 몇 개의 와인샵에 가서 소비뇽 블랑이 들어간 라벨이 예쁜 와인을 마셨다. 역시나 또 맛있었고, 추천을 받아서 마신 다른 소비뇽 블랑도 또 맛있었다. 몹시 행복했다.
이제 나는 어디 가서 소비뇽 블랑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청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것만 알지만... 알게 무어냐). 알코올의 세계는 대체로 무지한 내가 아주 조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는 기쁨이 있다. 나도 이제 친구 집에 사갈 와인이 있다고! 와인의 세계는 훨씬 깊고 넓어 보이지만 워낙 술과 친하지 않은 나는 이 정도에서 (우선은) 만족한다.
4. 올해의 다이어트
:: 올해도 날씬쟁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건강한 돼지는 하겠는데 몸무게 감량은 어려움을 몸소 느낀 한 해. 어느 정도 살을 빼고 나면 여지없이 다시 찌는 내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꾸준히 PT를 하며 점점 건강해지기는 했는데, 몸도 가뿐하다 느끼기는 하는데, 근데 무게는 차이가 없다.
반팔을 입었을 때 전완근이 잘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욕망이 생겼다. 주먹을 꽉 쥐면 윤곽이 드러나기까지는 됐는데... 아직 마음에 쏙 들만큼 완벽하지는 않아서 내년에도 노력하기로 했다. 근육 보이는 사람 너무 멋있잖아요. 그래도 팔뚝이 예전보단 덜 말랑해서 좋다. 딴딴한 사람이 되고 싶다.
5. 올해의 책
:: 숲속의 자본주의자,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그냥 하지 말라
앞의 두 권은 미니멀과 친환경을 이야기하면서도 돈이 좋은 내게 방향 하나를 제시해 준 책. 숲으로 들어가도 편리한 생활은 자본주의 덕에 영위할 수 있다. 욕구 그 자체보다는 욕구가 어느 선을 넘어서면 고통스러워진다. 자존감이 아니라 나에 대한 이해를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 인간은 이제 '지속적인 마이너스 성장'이 필요하다.
마지막 책은 코로나 이후 급변할 세상에 적응할 용기를 준 책이다. 동적이지 못한 주변 환경과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을 생각하면 신세계에서 도태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자체만으로도 구원의 여지는 있는 게 아닐까. 독립심과 창의성을 애지중지하기로 했다.
어릴 적엔 책을 읽고 이만큼 감명을 받으면 나의 롤모델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머리가 좀 컸지.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숙고했다. 섣불리 닮고 싶다고도 하지 않고, 작은 견해 차이가 있다고 섣불리 이렇게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세 권 다 주기적으로 다시 읽으며 꼭꼭 씹어 삼키고 싶다. 당분간 삶의 방향이 될 책들.
6. 올해의 영화
:: 크루엘라, 듄
보는 내내 재미가 넘쳤던 영화. 크루엘라는 원래 에스텔라였는데 Cruel 해지기로 마음먹고 스스로를 크루엘라로 명명했다. 사연 있는 입체적인 악역과 원작과의 자연스러운 연결, 처음부터 끝까지 감탄 나오는 의상/헤어/메이크업, 두 엠마의 눈을 뗄 수 없는 연기까지. 보고 난 뒤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른 영화였다. '저렇게 강해지고 싶다!'고 외치게 되는 여성 캐릭터가 할리우드를 날아다니는 게 너무 좋아!
보면서 오랫동안 좋아할 장엄한 세계관 하나 열렸다 싶어 웅장하게 설렜던 영화는 듄. 마블의 세계관에 지친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미니멀하면서도 세련된 영상 덕에 거친 세계임에도 빠져들게 하는 힘을 느꼈다. 허무맹랑한 SF세계관인데도 핍진성을 느끼는 이 기분은 뭘까. 이미 찍고 있다는 다음 편도 신나서 기다릴 계획이다.
7. 올해의 잘 산 물건
:: 와이잭 티셔츠
와이잭 반팔 티셔츠는 무지 흰 면티를 배송비 포함 4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큰맘 먹고- 구입한 옷인데 그 가격을 잊을 만큼 만족스럽다. 부드럽고 시원해서 입는 날마다 기분이 좋아. 목도 늘어나지 않는 모양에 박음질이 꼼꼼해 만듦새가 딴딴하다. 이 옷을 입으면 나를 대접하는 기분이 든다. 행복에 겹고 겹고 또 겨웠던 나는 결국 겨울용 검정 터틀넥도 샀다. 얘도 촉감이 너무 좋거든. 몇 년을 입을 생각을 하면 비싸지도 않다. 둘 다 최소 10년은 입을 심산.
8. 올해의 소비
:: PT, 환갑 기념 지출
나를 위해 쓰는 비용이라 여기며 PT를 계속 결제했다. 혼자 운동했다면 슬럼프라며 운동을 그만두었을 기간에도 PT는 약속이니 꾸역꾸역 헬스에 나갔다. 사회 초년생 남자 선생님과 능숙하고 친절한 여자 선생님을 만났다. 하나 하면 건강, 둘 하면 또 건강! 50m쯤 전력 질주하거나 몇 층쯤 계단을 올라도 숨차지 않게 체력과 심폐지구력이 좋아졌으면 좋겠다.
올해는 부모님 모두 환갑을 맞이하는 해다. 환갑이라니! 하며 놀라기만 하고 저축 계획에 축하 비용을 넣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큰 지출이라 인상을 찌푸리다가 태도를 되돌아봤다.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이런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순식간에 마음이 후련해져 저축 계획에서 벗어났고, 예쁜 축하를 받은 부모님도 아주 기뻐하셨다. 돈 쓰는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하며 아주 행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에도 불구하고 돈은 계획대로 모였다(왜 그렇게 불어나는지 정확히 모르겠을 정도로). 역시 삶은 - 좋게든 나쁘게든 - 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9. 올해의 실패
:: 한자공부
다른 실패도 있지만 실패해서 아쉬운 실패만 적어볼까. 1월 2일 기준 한자를 많이 봐야 하는 부서로 발령이 났다. 초심은 아주 야심 찼다. 한자 공부를 하겠다는 말에 남자친구가 천자문 교재도 사줬다. 천자문 안에 세상의 도가 다 있나니. 하루에 8 글자씩 5일쯤 열심히 했으려나? 이게 하늘천 따지는 아는 글자지만 8글자가 전부 모르는 한자가 되니 무게감이 만만치 않았다. 자꾸 전날의 한자를 깡그리 잊게 되고.. 공부는 무색해지고.. 생각보다 한자 몰라도 업무에 지장이 없고..
그리하여 대차게 공부를 실패했다 선언하는 바이다. 앞의 몇 쪽만 펼쳐진 교재가 책상 서랍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이럴 때 내년에는 꼭! 하겠다고 다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이 좀처럼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지키지 못할 말은 꺼내지도 말자!). 하기는 해야 하는데, 어디서 재미난 한자 강의 같은 거 안 해주나? '논어로 하는 한자 공부'가 있다면 얼른 수강하고 싶다. 논어도 읽고 한자도 외우고. 제가 공자 맹자 쫌 좋아하거든요.
10. 올 해의 목표 달성 & 돈 쓰기 원칙
2021 올 해의 목표 달성 :: 성공 3개, 실패 1개, 세모 3개 (성공률 64.2%)
목표 | 성공 여부 및 코멘트 |
몸 군더더기 줄이기 | 세모.. 연초보다 훨씬 좋아진 몸을 느끼지만 그게 몸무게라는 수치로 나타나지는 않기 때문에, 즉 지방을 많이 벗겨냈다는 뜻은 아니므로 세모를 준다. 그래도 스스로 더 만족하는 몸이 되었다. |
자산 총액 ** 이상 | 성공! 저축 액수도 원하는 이상으로 달성했고, 투자 수익률도 목표를 거뜬히 넘었다. 내가 잘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지만 좋은 조언을 잘 듣는 것도 실력이라고, 멋쩍게 말해본다. 내년에도 힘낼 예정. |
글 쓰기 실력 향상 | 세모.. 일주일에 한 번씩 블로그에 글 올리기는 (종종 건너뛴 주가 있지만) 성공이라고 봐줄만하다. 자체적으로 마감을 정해본 것인데 덕분에 없는 일상에서 콘텐츠 주워내는 법을 배웠다. 컨셉진 프로젝트도 재미있게 마무리했고 블로그에 힘은 빼고 마음은 넣자는 목표도 잘 지켰다(덕분에 방문자수는 급감했다). 그럼에도 세모인 이유는 브런치에 글 100개 쓰기를 중도 포기했기 때문. 방향을 다시 잡아 내년에 해보려고 한다. 안되면 또 하면 된다! |
특정 주제 공부해서 이해하기 | 세모.. 블록체인 공부와 기본적인 부동산 공부는 했다고 느끼지만 FD강의는 손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세모를 준다. 차트 읽기는 귀찮고 어려워. 강의해주시는 분의 스타일이 나와 너무 맞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고 써도 될까. 되게 대단한 분인 건 아는데 수업은 듣기 힘든 교수님의 강의가 오래간만에 떠올랐다. 낙오자라 송구합니다 선생님. |
업무 성과 내기 | 실패! 관리하는 콘텐츠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세팅하고 싶었는데 결국 20여개의 데이터가 어디로 유실되었는지 찾지 못했다. 내년에도 찾아낼 가능성은 희박. 똑똑하게 일하는 직원이 되기는 이리도 어렵다. 하하. |
여행 2회 이상 하기 | 성공! 10월에 청송/문경, 12월에 경주 여행을 갔다. 공교롭게도 2회 모두 부모님과의 여행이었네. 부모님이 가자고 하시지 않는 이상 코시국에 굳이 여행을 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포함되었기도 하다. 내년 목표에는 완전히 여행을 빼버릴 심산이다. |
중요한 자리에서 쓸 가방 구비, 옷 스타일 정착 | 성공! 가방을 사서 성공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 지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성공이다. 옷은 구비가 되었기에 만족, 가방은 언니에게 자유롭게 빌리기로 했다. 12월에 참석해야 하는 결혼식에도 언니의 가방을 들고 갔다. 들고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언니야. |
위의 목표와 몇 가지 겹치는 재무 목표도 있었다. 자산 총액 ** 이상, 중요한 자리에서 쓸 가방과 옷 구비는 위에 언급했듯 성공했다. 재테크 공부를 꾸준히 하는 건 FD 강의 때문에 스스로에게 세모를 준다. 그 외에 노후화된 노트북과 핸드폰을 교체했고 분산투자시스템을 -나름- 구축해서 기분이 좋다. 다만 남자친구와 부동산 임장을 다녀보고 싶었는데 그건 실패. 내년에 서울둘레길을 전부 돌고 나면 그래도 서울을 전체적으로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년에는 써요마요 리스트는 작성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돈을 허투루 쓰는 단계는 벗어났으니까. 작년의 내가 바란 올해의 나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시사에 밝은 직장인'이자 '간소한 삶'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여전히 내년의 나도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만으로도 30대가 되는 2022년인데, 이제 정말 어른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 올 한 해도 잘 살았다. 칭찬받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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