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침대에서 빌려온 책(주로 추리만화나 판타지)을 보며 과자를 먹는 게 하루의 즐거움이었다. 돌아보면 침대에 가루가 떨어진다는 잔소리를 하지 않은 엄마는 대단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어쨌거나 신나게 과자도 먹고 저녁도 잘 먹었다는 그런 이야기.
요즘은 누워서 음식을 잘 먹지 않는다. 더이상 젊음이 건강을 채워주지 않을 때, 절제가 필요할 때 참게 된 작은 일이다. 목의 이물감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첫 위내시경을 받고 나서야 이름을 알았다. 먹고 누우면 신물이 올라오는 역류성 식도염이랬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먹고 눕는 자세를 하지 마세요. 넵 선생님. 운동과 건강관리 덕에 식도염은 사라졌다. 그래도 조심한다.
하지만 여전히 침대에서 간식을 먹는 건 행복한 일이다. 충만한 삶에는 절제가 중요하다고 나불대지만 여전히 나를 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하찮은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럼 나는 너를 공모자로 만든다. 혼자서는 못해도 둘이서는 웃는 일. 재밌는 영상을 보며 내 입에 하나 네 입에 하나 넣는다. 치열하게 이야기도 한다. 주제는 정치, 사회, 오락물을 넘나 든다. 오래도록 좋기만 하다.
그런 네가 너무 편안해서 내가 실수를 했다. 크리스마스 근무를 뺄 수 있는 제안이 왔는데 하필 대체 근무일이 친구의 마켓을 같이 나가는 날이었다. 이건 안되는 거지. 30초도 생각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니 너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단정했다. 그냥 제안 자체를 바로 잊었다. 너에게 아무 언급도 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하필 크리스마스 근무가 끝나고 짧게 저녁을 먹던 날 털어놓고 말았다. 말하려던 생각도 없었는데 다른 이야기 끝에 무심코 따라왔다. 너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서운해 했다. 말했으면 이해해주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냐고. 아니 그건 아니고, 오히려 당연히 이해할 것 같아 말할 생각도 안 한 건데.. 얼마나 이기적으로 생각했던 건지 그제야 깨달았다. 너무 미안해서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에 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미안하다 말고는 할 말이 없더라.
착한 너의 마음이 풀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무룩한 내게 괜찮다고까지 했다. 나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네게 구구절절한 편지를 썼다. 너랑 오래 함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 나는 눈앞이 깜깜해진다. 네가 화가 났다는 생각만 해도 덜컥 겁이 난다. 오래 누워서 과자를 먹으려면 식도 관리 만큼이나 너도 섬세하게 아껴줘야지. 여전히 어화둥둥 앞태도 보고 뒤태도 보고 싶은 사람에게 미안했던 2021년의 연말이 지나갔다. 2022년에는 행복하게 해 줘야지. 쪽.
'FEEL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혐오를 토해내는 재미 없는 이야기 (1) | 2024.02.16 |
---|---|
1500이라는 숫자 (0) | 2022.06.20 |
갑분_꽃다발_타령 (0) | 2021.07.28 |
맥락없는 행운을 투척할 수 있다면 (0) | 2021.07.01 |
2020.12.12. - 13. 거대한 수성의 대사가 있는 곳 (0) | 2020.12.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