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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2020.12.12. - 13. 거대한 수성의 대사가 있는 곳

by 푸휴푸퓨 2020.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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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긴 데이트를 했다. 평소에 겨우 10시간 남짓 만나고 헤어진다면 이번에는 무려 36시간을 함께했다. 10시간을 함께 있으나 36시간을 함께 있으나 같이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행복만 3.6배쯤 더 커졌다.

 

거대한 수성에서 온 대사가 당신인가요

 

  조리가 가능한 숙소를 잡아서 신나게 장을 봤다. 뭐 별로 사지도 않았는데 10만 원이 금방 나왔다.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으려고 프런트에서 HDMI 케이블도 빌렸는데 와서 보니 내 노트북 잭과 맞지 않았다. 노트북으로 보자 싶었는데 그마저도 와이파이 보안이 어쩐다며 넷플릭스 자체가 차단돼서 결국 꺼졌다. 혼자였다면 시무룩했을텐데 너와 있으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먹기나 하자! 부칠 줄 모르는 전을 부치고, 후라이팬을 열심히 긁고, 처음 써보는 오븐을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이제와 생각하면 츄러스 믹스를 사다가 오븐에 구워 보았어야 했다. 아쉬워라.

  오래간만에 맥주도 한 잔 했다. 술은 안마실수록 점점 줄어서 애플 사이다를 고작 반 캔 마셨는데 얼굴이 벌게졌다. 나를 보고 너는 무방비하다고 웃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서 사소한 말에도 와락 웃음이 쏟아졌다. 신비하려면 호호호 하고 웃어야 하는데 나는 매번 으하핳핳 웃었다.

  너는 코를 크게 골아서 자다가 사라져 버렸는데, 옆이 허전해서인지 나는 기억나지 않는 악몽을 꾸곤 번뜩 잠에서 깼다. 뭐야. 어디갔어. 자기 전 마신 술에 못 이겨(애플 사이다 한 캔을 결국 다 비워냈으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데 커다란 코골이가 들렸다. ? 설마 지금 침대 옆 바닥에서 자고 있나? 자세히 들어보니 소리가 크긴 해도 바깥에서 나는 소리더라고. 소파에서 자고 있구나. 얼마나 크면 침대 바로 옆이라고 착각했는지 혼자 웃음이 나왔지만 너한테는 별로 코도 안 골면서 왜 나갔느냐 했다. 너는 정말 괜찮았냐고 여러 번 다시 물었다. 아니 크건 작건 골아도 상관이 없다니까 난!

  그런가 하면 케이크는 먹고 싶다면서 바깥에 나갈 생각은 없는 여자친구를 위해 너는 빵집을 돌았다. 케이크 맛있겠다, 아 나가기 싫어, 만을 무한반복하는 나에게 너는 별 일 아니라며 훌쩍 케이크 천사가 되어주었다. 참나. 뭐가 이렇게 좋아. 케이크를 챱챱, 아아도 챱챱, 꿀꽈배기도 챱챱, 너가 주는 마음도 챱챱. 달달한게 끝없이 잘도 들어갔다. 그럼 짠건 안 먹었냐고? 네가 로비에서 픽업해온 피자도 파스타도 꿀맛이었다.

  집에 돌아가기 직전 마지막 저녁을 먹으면서는 어찌나 마음이 아쉬운지 몰랐다. 평소에는 보지도 않던 1박 2일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재미있지도 않은데 그냥 같이 있다는 게 좋아서 더 웃었다. 10분 이따 나가야 한다니 지금이 너무 소중하잖아. 다신 못볼 사이도 아니면서 애틋하게 억지로 집으로 향하는 건 너와 사귄 지 2년 반이 훌쩍 넘었어도 여전했다. 여전해서 너무 좋았다.

  사실 너와 나는 영상물 취향이 맞지 않는다. 공포, 스릴러나 시련으로 꽃피우는 비극을 좋아하는 너와는 달리 유치한 해피엔딩이나 건조한 다큐를 좋아하는 나. 사랑하기 시작하면 같은 점을 발견하며 서로가 똑같다고 좋아한다는데, 우리는 이제 그 단계를 넘어 서로의 다른 점도 볼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서로 이렇게 달랐냐며 서운해하거나 실망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내가 잘 모르는 영역에 네가 있는 게 좋다. 웃음소리 같은 것들로 신비주의를 할 순 없게 되었지만 자연스러운 취향이 여전히 신비한 건 좋은 일이지. 우리는 수많은 컨텐츠 탐방 끝에(이건 어때? 으으 딴거 보자. 이건? 으악 무서운거 싫어!) 같이 레바툰 애니메이션을 봤다.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는 찐 변태는 존중할만했다.

  몇 달 전에도 나는 36시간 동안 머무를 수 있는 숙소를 잡은 적이 있다. 마음이 아파 동굴이 필요했던 터라 네게는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와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적적한 밤을 보내고 네가 도착했었지. 차가운 고요함이 오히려 위로였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주는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처음부터 부르지 않은 걸 많이도 후회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36시간을 오롯이 함께했는데요, 36시간 내내 쓰다듬고 얘기하고 좋아했답니다. 코로나 시대에 다음 데이트를 기약하는 것마저 어려운 요즘이지만 네가 주는 따뜻함만 있으면 뭐든 괜찮은 기분이다. 오래 있어줘,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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