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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도서관] #6 신간은 없어도 구간은 가득히

by 푸휴푸퓨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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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니는 도서관은 서가 사이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책이 많다. 책 속에서 길을 잃는 일은 말만큼 낭만적이지는 않다. 다닐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건 길치이기 때문일까. 제목도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 서가 사이에 갇혀 예술 분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 위 팻말이며 바닥의 표시선을 부지런히 따라간다. 출구는 또 어디야.

  책이 가득 찬 도서관이지만 생각보다 없는 도서가 많다. 국내에서만 한 해에도 몇 천 권의 책이 나오니 현실적으로 모든 책을 다 구입하기란 불가능하다. 예산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수서 원칙에 따른 제약도 있다. 각 도서관은 자료를 구입하는 기준이 있다. 학술 연구를 지원하기 위한 대학 도서관은 연구를 위한 책이 일반 도서보다 중요하다. 당연한 일이다.

  도서관의 책 구입 속도는 출판 시장이 돌아가는 속도만큼 빠르지 않다. 호기심이 생기는 신간(新刊)을 바로 대여할 수 없을 때는 일단 포기하고 1년쯤 뒤에 찾아보곤 한다. 이쯤 되면 판가름이 나 있다. 구입했다면 인기가 사그라들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이오 구입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안 살 책일지니. 긴 호흡으로 인내를 배우며 읽고 싶은 도서 목록을 꾸준히 업데이트한다.

  포기를 배우는 신간과는 달리 구간(舊刊)은 뜻밖의 횡재가 가능한 보물찾기 같다. 어디선가 1980년대부터 출판되었다는 열화당의 사진문고 시리즈 이야기를 읽었다. 판매는 안하더라도 그 옛날 도서관에서 반드시 구입했으리란 직감이 찌리릭 박힌다. 서둘러 검색하니 역시나 한가득 있다. 신나서 사진집 서가로 달려가면 사진문고 시리즈가 다른 사진집과 여러모로 섞여있다. 서점처럼 시리즈별로 진열할 수 없다는 것도 도서관의 특징이다.

  사이사이 섞여있는 다른 사진집 중 한 권을 꺼내든다. 이름도 처음 들어본 사진작가지만 소개를 보니 20세기를 관통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얼른 빌려와 며칠을 아껴 읽으며 한껏 사진을 즐겼다. 열화당 사진문고가 한데 모여있었다면 주변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다. 도서관의 보수적 원칙을 기반으로 한 청구 기호 부여와 서가 브라우징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이다.

  절판되어 중고도 구입할 수 없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갖고 싶어 안달이 났던 적도 있다. 도서관에 분실했다 이야기하고 배상을 하더라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양심상 차마 그럴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반납했지만, 그 옛날 이 책을 산 누구인지 모를 담당자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에 가득 찬 많은 책이 이런 사연을 담고 있겠지.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군가는 미치도록 갖고 싶었을 수도 있는.

  그리하여 요즘도 신간이 없는 도서관을 열심히 뒤적인다. 좋아하는 사람의 몇 년 전 인터뷰를 찾아 읽고 그때의 추천도서를 읽어보고 싶어하는 참이다. 두근두근 홈페이지를 검색하면 역시, 어드메에 꽂혀 있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는데.

추신 1. 혹시나 이제는 나오지 않는 시리즈라고 혼돈을 줄까 싶어 적어보자면, 열화당은 여전히 사진문고 시리즈 신간을 판매한다. 물론 우리 도서관도 여전히 그 책을 산다.

추신 2. 분실 신고까지 하고 갖고 싶었던 책은 바로 파타고니아 대표 이본 취나드의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 나만 갖고 싶었던 건 아닌지 멋진 표지로 재출간되었다. 아주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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