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회사 건물 어드메에 물이 샜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천장과 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정전이 되었다. 급히 편성된 비상조에 들어가 어두컴컴한 공간을 돌아다녔다. 쓸데없이 많이도 사두었다 생각했던 재난 대피용 손전등이 참으로 요긴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물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다녔다. 찾아도 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비가 올 때는 그렇다 치고 비가 오지 않을 때도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다. 나무 가구와 책이 젖어드는 모습을 봤다.
회사에 산모기가 많았다. 어두컴컴한 야외에서 손전등을 켜고 있노라니 모기가 달려들었다. 크게 멍이 든 것 마냥 자국이 남았다. 내년에 또 폭우가 온다면 별다른 대책이 있을까. 일주일이 지났고, 회사는 아직도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다.
2.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를 몹시 좋아한다. 서가를 지나치다가 문득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제임스 써버)'이란 소설을 발견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이구나 싶어 읽기 시작했다가 깜짝 놀랄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은 써버의 몽상가적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작이다. (중략)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이 엄청난 대중적 호응을 얻으면서 '월터 미티'라는 이름은 '평범한 삶을 살면서 터무니없는 공상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질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일례로, 스누피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스누피를 "월터 미티 콤플렉스를 가진 외향적인 비글"로 소개하고 있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 역자해설' 中
인생은 끝없이 배우는 일의 연속이지만 이번에는 늦게 알아 좋기도 하다. 영화가 좋아서 월터 미티라는 주인공 이름을 내내 잊지 않았다. 미국에서 통용되는 뜻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순수하게 월터 미티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못했겠지. 오래간만에 영화가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틀어놓고 스르륵 잠들면 좋겠다.
3.
출근 버스에서 두 사람이 같은 샌들을 신고 있는 걸 보았다. 나도 살까 고민했던 샌들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 같은 디자인으로 여러 중국산 브랜드가 판매하는 걸 본 터라 꼭 같은 샌들이라 할 순 없었했다. 디테일을 살펴볼 만큼 다른 사람의 발을 쳐다보긴 멋쩍어서 고개를 돌렸다.
신발을 신은 두 명은 20대 중반, 후반까지는 되지도 않았을 나이로 보였다. 나는 결국 저 샌들을 사지 않았고 고민하다 핏플랍 샌들에 정착했다. 그리고 내가 신은 샌들을 신은 사람도 자주 만난다. 대체로 30대다. 나도 몇 년 전엔 아줌마 신발처럼 보여서 핏플랍을 신고 싶지 않았다.
'내 또래'라고 부를 연령대가 높아졌다. 20대 초반의 나는 컨디션을 이유로 베개를 따지거나, 음식을 가리거나 하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거 적당히 맞추면 안돼? 까탈스럽긴). 하지만 인정해야지. 그렇게 고르지 않으면 다음날 컨디션이 견디기 힘든 수준이 된다는 걸 몰랐던 탓이다. 이제 나도 다음날의 컨디션을 위해 오늘을 조절하는 아줌마가 됐다. 그래요. 저는 왼쪽으로 보나 오른쪽으로 보나 딱히 동안이지도 않은 30대입니다. 어쨌거나 핏플랍은 아주 편하다.
난 이제 어딜 가든 체력 문제로 술도 진탕 못 마시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조금 무서워졌다. 여행의 낭만을 만끽하며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것보다는 심신이 편안한 호텔을 선호하게 됐다. 이십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저 언니 완전 노잼으로 여행하네'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나이를 먹고 모든 게 조금씩 변하는 건, 그 변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 해도 내 힘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또한 나는 새벽의 루앙프라방 길거리에서 바라지 않았던가. 여기가 아닌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그것은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을 수 없다는, 어떻게든 변해야만 한다는 내면의 주문이나 다름없었다.
'읽는 사이 - 구달, 이지수' 中
4.
DDP에 가구 전시를 보러 갔다 기분이 상한 일을 구구절절 작성하다 지웠다. 기록해서 무엇하리, 잊으면 그만인 것을. 나이듦의 흐뭇함은 나쁜 기억이 점점 빨리 휘발될 때 생겨난다. 가뿐하게 살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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