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8월 첫 주는 찌뿌둥한 채로 지나갔다. 한 시가 아깝다며 아등바등했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의 목표는 오로지 휴식이었다. 무계획이 계획이었기에 별일 없이 지나간 건 아쉽지 않다. 다만 그 별 일 없는 상황이 개운치 않았다는 게, 몸도 마음도 몹시 꿉꿉했다는 게 아쉽다.
마음이 꿉꿉했던 건 아빠 때문이다. 월요일에 아빠가 입원을 하셨다. 진단명을 모를 땐 마음을 졸이며 가만히 있기 괴로워 마늘을 빻고 집을 청소하며 법석을 떨었다(아빠의 병명은 담낭염이었다). 몸이 꿉꿉했던 건 당연히 날씨 때문이다. 덥고 습해서 에어컨을 틀지 않은 구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에어컨을 내내 틀자니 환기도 시키고 싶고 몸도 텁텁한 느낌이고. 이래저래 아무 의욕도 없었다.
그래도 내리 시간을 보냈는데 뭐든 생각은 했을 것 아니에요? 아예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음을 기억하기 위해 몇 가지를 기록해 본다. 남자친구를 만나는 외출 빼고는 모두 주거지 반경 100m 이내에서 사부작거렸다. 지독한 집순이.
1. 수공예
양모펠트를 처음 해봤다. 발레하는 햄스터와 딸기를 뒤집어쓴 시바를 만들었다. 샘플과 묘하게 달라도 나름대로의 귀여움이 뿜어져 나와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바늘에 손을 몇 번 찔리기는 했지만 바느질이나 십자수처럼 숫자를 집중해서 세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성격과 잘 맞는 공예다. 머리를 텅 비우고 싶을 때 또 해볼 의향이 있다. 만들 대상을 직접 창조해봐도 재밌을 것 같아. 언니도 좋아했다.
2. 영상 보기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를 봤다.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을 갈 줄 알고 보았는데 음,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시 보자고 언니와 약속을 여러 번 했지만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다. 비비안 마이어는 엄청난 양의 사진을 찍었고, 모든 걸 모으는 수집가였고, 독특한 구도와 시각이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그저 평범한 유모였다. 나는 마이어의 사진 촬영 능력보다 그 많은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참은 절제력이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모든 걸 과시하는 요즘 시대에 마이어가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시사기획 창 'MZ세대, 회사를 떠나다' 편을 보았다. 지방 중소기업에서 인력을 구하기 힘든데 그게 52시간 근무제 때문이라는 인터뷰는 어이가 없었다. 변화는 천천히 오는 거니까. 회사를 지키는 입장보다 떠나는 입장에 더 공감이 가서 아직 많이 늙지는 않았구나 생각하였다.
박해일 주연의 '한산: 용의 출현'을 보았다. 박해일도 좋았지만 와키자카 변요한의 연기도 좋았다(생각해보면 변요한의 연기를 늘 좋아하네). 국뽕이 차오르지만 너무 심한 신파도 없고 오그라들게 폭발하는 감정도 없어서 더 좋았다. 박해일의 이순신은 오래전 김명민의 이순신을 떠오르게 한다. 조용히 고뇌할 것 같은 단정한 얼굴. 남자친구가 속삭여주는 진법과 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영화를 보았다. 상당히 재미있었다.
흥미로운 유튜브 채널을 발견해서 영상을 정주행했다. '로동복어'라는 채널인데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내게 추천한 적이 있었다고. 집수리하는 영상에 이끌려 보기 시작했지만 모텔 알바생 시절의 영상도 볼 계획이다. 뚝딱뚝딱 야무진 손이 심하게 멋지다. 나도 드릴을 와다다다 박고 싶어!
3. 책 읽기
책을 여러 권 읽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를 읽었는데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늘 깔끔하게 만족스럽다. 다양한 형사의 특징도, 당시 스웨덴 사회에 대한 비판도, 결국 해결되는 사건도 전부 그렇다. '비비안 마이어 셀프 포트레이트'는 마이어의 사진을 다양하게 보고 싶어 빌렸지만 셀카만 모아둔 사진집이어서 실망했다. 셀카만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나쁘지 않은 책이겠지.
두꺼워서 읽기를 미뤘던 '꿈을 파는 빈티지샵'은 패션과 빈티지를 좋아하면 읽기 딱 좋은 가벼운 칙릿 소설이라 시간을 보내는 용도로 좋았다. 표지에 반해(영화 플로리다프로젝트가 떠오른다) 읽은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는 분명 읽는 내내 지루했는데 완독하고 나니 무언가 좋아서 저자 인터뷰도 찾아보았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저마다의 세상은 납작하지 않고, 그 모두를 존중할 가치가 있지 않겠나.
그리고 '나, 프랜 리보위츠'를 읽은 뒤 후기를 썼다. 리보위츠가 나를 뿅망치로 뿅 뿅 치는 듯이 느껴졌다. 사상의 발칙함보다 스스로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자극적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비겁해져만 간다. 용기는 다 어디로 가나. 다음 메인에 올랐다는 점도, 내가 출간을 바랐던 책이었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앞으로도 출간을 원하는 책이 있으면 홀로 떠들어봐야지.
4. 방문
남자친구를 보러 어느 저녁 공덕에 놀러 갔다. 전집을 가자는 제안에 '공덕 청학동 부침개'를 갔다. 근데 무한도전에 나왔던 전집이라는 거야! 정총무가 쏜다를 보고 나도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어언 10여 년 전이구나. 이제 나는 먹고 싶은 전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고 막걸리도 한 잔 걸칠 수 있는 으른이 되었다. 전은 천상의 맛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기름에 지졌으니 뭔들 맛이 없겠나. 오랫동안 궁금했던 곳에 드디어 가보게 된 어느 날.
5. 집안일
엄마가 병원에 가셨으니 집안일은 당연히 해야지. 언니와 쿵짝쿵짝 집안일을 했다. 분리수거는 부피가 커서 귀찮지만 벌레가 꼬이는 쓰레기나 음쓰보다 훨씬 낫다. 마음이 산란할 땐 마늘을 빻고 바닥은 하루만 지나도 먼지가 쌓인다. 언니는 전 부치기보다 빨래가 낫다고. 팡팡 털어가며 허둥지둥 구워가며 며칠을 보냈다. 쾌적한 삶에는 불쾌적한 노동이 함께한다. 보람은 있다.
6. 운동과 식단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PT를 한 번 받고 개인 운동을 한 번 갔다. 마음이 심란해서라는 나조차도 납득가지 않는 이유를 적어본다. 집에 있으려니 시간이 많아서 배가 고프지 않아도 자꾸 무언가를 먹게 됐다. 아침에 대한 걱정이 없어 맥주도 홀짝거렸다. 부은 기분과 둔중한 몸만 남았다. 어쩌겠어. 한 땀 한 땀 수선하는 기분으로 몸에 땀방울을 흘려야겠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다시 일상에 적응하고 하루의 쳇바퀴를 굴린다.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1년이 가면 10년도 가겠지. 삶이 지겨운 순간에는 지겨울 때가 복된 때라는 진실을 생각한다. 겸손하게 지겨움을 버텨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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