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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2.7.29. 직전의 시간은 느리게만 간다

by 푸휴푸퓨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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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가 재활을 한답시고 너무 심하게 걷기 운동을 해서 얼굴이 노래지고 허리가 아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어마어마한 공력을 들여 아빠를 설득했고, (우리 집에서 무한한 신뢰를 받는) PT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동원했다. 어쩜 이렇게 우리 아빠는 질주하기만 할까.

  아빠의 허리 수술이 급격히 당겨진 데에는 무리한 해파랑길 완주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전체 길을 완주하기는 했지만, 덕분에 아빠의 발톱은 두 개가 빠졌고 두 개는 새까맣게 죽었다. 아니, 누가 쫒아오나! 완주가 뭐라고 그러셨나 싶었지만 책장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완주 증서를 전시해 두고 오며 가며 흐뭇해하시는 모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아빠는 저게 정말 좋구나.

  아빠는 성취감 중독이다. 특히나 육체적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진심이다. 허리와 다리가 견딜 수 없이 아파도 하루 종일 걸어야하고, 수술 후 허리 지지대를 하고도 걷기 3바퀴에서 5바퀴, 6바퀴로 늘려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만족스럽다. 아빠의 우직한 면모가 우리 집을 지금까지 이끌어왔고 덕분에 편안히 생활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아빠를 괴롭히고 육체를 무너지게 하고 있다.

  아빠가 질주 대신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셨으면 한다. 이제는 아빠도 즐겨도 좋다고, 아빠의 어깨 위에서 많은 것이 내려왔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그래야 더 오래 앞으로 가실 수 있잖아. 다행히 아빠는 우리의 설득 끝에 3시간에 달하던 운동을 1시간 반 정도로 줄였다. 아빠의 귀는 아직 열려 있다. 계속 천천히 가자고 설득할 테다.

 

2.

  다음 주는 일주일간 출근을 하지 않는다. 무계획이 계획이라 부르짖었으나 날이 다가오니 하루 이틀 계획이 생기기는 한다. 모아뒀던 재활용품을 주러 제로웨이스트샵에도 가야 하고, 동기들과 포천에 놀러도 가고, 오래간만에 홀로 사진전도 다녀오려 한다. 비비안 마이어의 전시회가 마침 개막한다지 뭐야.

  알라딘에서 사진집 신간을 둘러보다 비비안 마이어를 발견했다. 은둔 작가였다는 소개가 기억나서 이리저리 찾아보다 갑자기 매력에 빠졌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찾고, 책을 빌리기 전에 여러 블로그 리뷰를 읽다가 2016년 정도의 전시회를 놓쳐 아쉽다는 글을 읽었다. 나도 아쉽네.. 하고 있는데 오잉, 글의 마지막에 갑자기 8월 4일에 사진전이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오잉오잉 하다 또잉또잉하니 어느새 얼리버드 티켓까지 구매 완료. 신간 사진집 발견부터 20분도 채 걸리지 않은 후루룩짭짭의 예매였다.

  기가 막히게 전시가 열린다 싶다가 문득 깨달은 건, 사진집을 찾았데 맞춤하게 전시를 하는 게 아니라 전시가 열릴 걸 알고 사진집이 새로 출간된 것이겠구나 하는 점이었다. 내가 비비안 마이어를 발견한 게 아니라 비비안 마이어를 발견할 수밖에 없게 만든 문화 산업의 상술에 당해버린 20분이렷다... 발견의 순수한 기쁨은 변색되었지만 어쨌거나 마이어의 사진을 크게 보고 싶은 마음은 있기에 즐겁게 다녀오기로 했다. 유행에서 멀어지기는 힘든 일이야. 이렇게 산업에 낚이고 낚인다.

 

3.

  업무로 100여 명 앞에서 발표할 일이 있었다. 나름대로 준비했는데 글쎄. 절반의 만족과 절반의 불만족이 남았다. 애초에 준비된 내용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고, 내 마음대로 내용을 버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앞에서는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뻔뻔히 분위기를 주도했는데 뒤로 갈수록 마음이 급해 말이 너무 꼬였다. 마음을 진정시킬 1초도 여유가 없었지. 여러모로 발표를 하게 되기까지의 경위가 마음에 쏙 들지는 않지만 예상보다 잘 들어준 청중 덕에 기분이 산뜻했다. 스스로에게 88점 정도를 주기로 했다.

문 22. 경성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몇 명인가?

 

  사소한 업무 실수가 있어 소소히 수습했다. 혼자만 아는 것도 있고 위에 언급을 해야 하는 것도 있었다. 수습 가능하면 실수가 아니라고 주변인에게 여러 번 말했는데, 정작 내 일이 되고 나니 마음이 복잡하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고 나를 후려쳐야 할지 실수가 아니니 당당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언은 쉽지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는 어렵군. 똑 부러지는 사람이 되고 싶다.

 

4.

  남자친구가 장염인지 식중독인지 모를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배탈이 나고 미열도 나고 두드러기가 나기도 했다. 진득이 음식을 조절했으면 하는데 조금만 나으면 자꾸 일반식을 먹고 증상을 재발시켜 마음이 속상하다. 지난 주말 우리의 데이트가 재발의 분기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속상해. 아주 싹 낫지 않으면 이번 주 데이트는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한 말은 지킨다! 아프다는 이야기에 구박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자꾸 잔소리가 나온다. 이게 다 관심이고 애정이라면 비겁한 변명이겠지. 자중하겠습니다.

미니언 빵댕이 귀엽다고 할때까지만 해도 두드러기 날 줄은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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