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 보는 집안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엄마는 점을 믿지 않는다. 친가의 할머니, 고모, 큰엄마는 꽤나 좋아하시는 눈치로 전해 들을 이야기로는 종종 우리집의 점 까지 보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할머니 집의 모든 문 위에는 두 개 이상의 부적이 붙어있어 가끔 신기하게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아무튼 그래도 뚝심있는 우리 엄마는 저희 집은 안봐주셔도 된다며 거절하여 우리집은 점 청정구역이다.
그래서 나도 점을 보아야 겠다고 딱히 움직여 본 적은 없다. 어떤 일에 관해서든 점을 보아서 잘 된다고 하면 자만할 것 같고, 잘 안된다고 하면 지레 움츠러 들어 포기할 것 같기에 나에게는 이래도 저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다. 어차피 인생을 내걸만한 위험이 걸린 일은 선택하지 않으니(지금까지야 어려서 딱히 결정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고 앞으로 그럴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다만은) 점을 많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사주를 본 것은 고3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니와 나만 있었다면 절대 보지 않았을 텐데, 사촌언니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랬던지 선뜻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억나는 건 오랫동안 공부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과, 부모님께 잘 할 것이라는 것과, 남편 무시하지 말고 잘하라는 것... 정도?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면서 나왔던 것 같은데 쓰려고 보니까 기억 나는 것이 이것 밖에 없던가. 고3인데 공부를 오래 한다기에 "네!?!?!?!? 싫은데요!?!?!?!"라고 말한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는 효녀가 될 거라는 말을 지금까지도 마음에 담고 계신다.
첫 번째의 기억이 워낙 훈훈했던지라 그 이후로 사주는 종종 보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말 제대로 잘 보는 곳에서라면 점이나 뭐 관상도 봐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조금씩 솟아올랐다. 아직 행동으로 옮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주를 다시 보러 갈 정도는 되었다. 두 번째는 신촌 모 까페에서였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조금 상술에 넘어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보고 나서 직후에도 바로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관,이라는게 좋다고 해서 직업이 잘 될 것이고 했던가. 대학교 다니면서 남자친구는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캐묻는데 대답을 회피해서 연애는 포기해야겠다는 슬픈 기억 하나만은 강렬하다. 그래도 결혼은 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지. 그...그래요 감사해요^^;란 마음을 3년 정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화요일에 또 사주를 보러 갔다. 두 번째에 보러 간 바로 그 까페에 다시 갔기에 큰 것을 기대하고 가지는 않았다. 그냥 심심풀이로 우리 학교 앞에 있는 유일한 곳에 다시 간 것이다. 아저씨가 나오셨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젊은 여자분이셨다. 그래서 더 쉽게 질문을 했는지, 그간 쌓인 나의 낯설기버리기(?)덕분인지 여하튼 이것 저것을 꼼꼼하게 물어보았다. 만세력도 집중해서 다시 살펴보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내 운명이 마음에 든다.
오행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말에 신이 났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다시 살펴보니 정말 고루 다 들어 있어서 신기했다. 엄청난 운을 타고 난 것은 아니지만 평생 평탄하게 복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이 고마웠다. 엄청난 것을 바라고 살지 않는다. 일신과 마음의 평안을 추구할 뿐, 이라기엔 그 둘이 가장 큰 것이려나. 스펙타클한 것은 없냐고 아무리 여쭤봐도 그런 사주가 아니라고.. 자세히 나오는 만세력 풀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내 명을 넣어보아도 별로 나오는 것이 없다. 정말 평탄하게 살 수 있을까?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좋다. 아빠는 항상 꿈이 좋은 아빠였기에 더 큰 사람이 되지 못해 안타까웠다며 큰 꿈을 가지라고 하시지만 난 그저 작은 행복에 기뻐하고 만족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것에 딱 맞는 내 사주가 좋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평안하고, 내가 평안하고,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미래의 가족들이 평안한데다 역마살이 있어 많이 돌아다닐 수도 있는 사주라니 여행도 많이 다녀야지. 일도 열심히 하고 살 수 있다고 해서 그저 마음에 들기만 했다.
누군가는 내 사주와 같은 사주를 타고 나고도 마음에 안들지도 모르겠다. 거한 출세를 하지도, 무지막지한 부를 쌓게 되지도 않는단다. 놀고 먹고 살지는 않고 계속 일하면서 살게 된다하고, 역마살이 있어서 돌아다녀야 한다고도 한다. 가만히 집에서 돈이나 세며 떵떵거리고 살 사주는 아니기에 마나님이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이 다 잘 된다고 하고, 건강도 좋고 남편도 나 사랑해 준다 하고 자식 복도 있다고 하고 도대체 걱정할 것이 없잖아? 내가 원하는 삶과 사주가 일치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 사주가 지금까지의 나를 이끌었을테니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운명론자는 아니다. 이번 사주도 얼마 더 시간이 지나면 많은 부분을 잊어버릴 것이다. 어느 부분이 내 기억에 남을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앞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할 때,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읽은 책에서 말하기를,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불안이라고 했다. 생 전체에 함께할 불안이라면, 사주도 받쳐주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앞으로 가는거야! 빠샤!!!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얼굴을 걸고 하는 것 (0) | 2013.10.19 |
---|---|
바람이 분다 (0) | 2013.10.12 |
우울한 4학년 외로운 4학년 (0) | 2013.09.11 |
제목을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다 (0) | 2013.08.24 |
여행 말고 이제 집에 있을래 (0) | 2013.08.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