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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4.1.2.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근데 이제 내가 먼저 웃어버리는)

by 푸휴푸퓨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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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리스마스에는 별 것을 안 해도 좋아, 이틀 연속 만나도 좋아, 멋진 선물을 아무렇지 않게 해주는 너의 마음이 좋아

  사귀고 첫 1~2년간 우리는 크리스마스라면 특별한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우리라기보다 열받은 나만 그랬던 것도 같고. 그 모든 시간을 넘어 크리스마스거나 말거나 연말이거나 말거나 늘 비슷한 시간을 보내는 커플이 됐다.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보고 싶다고 제안한 ‘리빙: 어떤 인생’을 보았다. 이런 영화는 싫어하겠거니 하며 지루하였다는 평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며 말을 꺼내 오래 이야기하게 됐다. 서비스를 해주어야 하는 직업은 이렇지. 영화를 열심히 보는 건 오로지 끝나고 나와서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나의 영화 관람 역사는 B.JIN.과 A.JIN.으로 나뉜다. 관람 영화 수가 극명하게 갈리는 분기점이다.

  신정 주간에는 이틀간 데이트를 했다. 우리는 내가 가고 싶었던 가구 쇼룸을 돌아다녔다. 평일에 출장 내고 다니기 번거롭단 말이야. 가구에 관심이 없는 너는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며 나를 따라다녔다. 새 도서관에 넣겠다고 고른 가구 브랜드 중 하나는 오랫동안 의자가 탐나던 곳이었다. 갖고 싶었던 라운지 체어는 실제로 보니 더 좋았다. 감탄하고 가게를 나오는 길에 네가 의자를 사주겠다고 했다. 생일 선물 미리 주는 거야, 하며. 고맙다고 방방 뛰는 나에게 던진 “몇 번이나 갖고 싶다고 했는지 아느냐”며 너는 장난을 던졌다. 아, 제가 그랬나요. 앞으로 앉을 때마다 네 생각을 하겠지.

아름답ㄷㅏ,,너

 

  의자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면서 자신에게는 잘 쓰지 않는 큰 돈을 쓴다. 음식을 먹을 때 꼭 첫 입은 먼저 준다. 나는 네가 건네주는 단순하지만 따뜻한 애정이 좋다.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 보고만 있어도 소중한 것.

 

말하고 귀여운척 뭔데

 

 

2. 고전을 읽자, 핵심을 파악하자

  고전은 지루하고 시대 착오적인 부분이 많다는 생각에 잘 읽지 않았다. 여성 캐릭터가 마음에 들기 힘들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문득 고전을 독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은 책을 정리해 보니 읽어도 읽지 않아도 그만인 책만 많이 읽고 있더라고. 일반 책에 비해 고전은 뼈대가 튼튼할 확률이 몇 배는 높다. 근본을 파고드는 해가 되는 것도 좋겠지. ‘남아 있는 나날’이 너무 좋았던 걸 계기로 24년에는 고전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시간을 이겨낸 데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근본을 이야기한 김에, 요즘은 조형을 단순화한 추상화에 관심이 간다. 몇 년 전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을 보고 추상화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화려했던 그림이 나이가 들어가며 간단한 도형으로 변화하는 게 보였거든. 추상은 말도 안 되는 낙서가 아니라 핵심만 남기는 과정이었어. 삶도 생각도 그림도 간결한 게 좋다. 현대 미술은 잘 몰랐는데 ‘이건희 홍라희 컬렉션’을 읽고 한국 작가 몇 명을 알게 됐다. 유영국 작가의 그림이 멋지더라고. 공부해 볼 생각이다.

 

 

3. 역작이 될 업무에 대하여

  주말에 업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같은 업무를 할 기회는 퇴직할 때까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애초에 자주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고, 윗사람이 적은 조직에서 마침 일하고 있기도 힘들고, 그 와중에 좋아하는 분야의 일이 넉넉한 예산으로 내게 주어질 확률은 더 낮다. 일생에 오래 기억될 시간이 될 줄도 모른 채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건 싫어.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남이야 어떻게 평가하건 말건 나는 나를 위해서 이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할 거다. 커리어를 돌아봤을 때 중요한 지점이 될 일을 적당주의로 넘겼다가 후회하고 싶지 않다. 퇴직하려면 몇 십 년이 남았지만, 그 수십 년 중에 가장 빛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가진 역량을 모두 동원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물 앞에서 이 프로젝트는 제 역작이라고 말할 수 있죠, 하며 웃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다. 2024년은 그렇게 멋진 업무의 해로 기억되면 좋겠다.

 

 

4. 언니와 즐거운 당근 타임

  언니가 며칠을 서울 집에서 보냈다. 주말에는 강원도 여행을 가려 했는데, 눈이 많이 와서 취소했다. 미끄러지면 큰일 나지. 언니의 다리는 아직 회복 중이다. 가만히 있으면 다리가 저려서 오래 서있지 못하고, 걷다 지치면 절뚝거린다.

  하지만 심심한 마음은 다르지! 가구에 대한 마음이 뻐렁쳐오르던 나는 폐업하는 책방의 당근 게시물을 찾았다. 불편한 책상 의자를 대체할 원목 의자가 있지 뭐야. 한창 가구를 많이 들여다봐서 그 의자가 3만 원인 건 정말 염가라는 걸 알았다. 바로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이거 사고 싶어.

  여행이 취소되고 이틀간 집에만 있던 언니는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뻐렁쳤고, 그렇게 각자 뻐렁치는 마음을 가진 자매는 씩씩하게 몇 정거장 떨어진 책방으로 향했다(사실은 가기 전에 좋아하는 타르트집에 들러 크레이프케이크와 딸기타르트도 후루룩 했다). 문 닫는 가게 주인은 섭섭하겠지만 물건이 좋더라고. 벤츠 SUV를 끌고 온 중년의 부부와 경쟁하며 의자를 샀다. 언니도 눈여겨보던 탁자를 골랐다.

  번화가라 운전이 힘들거라며 차를 놓고 왔는데 오는 길 내내 후회했다. 여정의 시작은 힘이 넘쳤다. 나는 의자를 끌어안고, 언니는 탁자를 둘러멨다. 사람들의 시선에 머쓱해서 그렇지 나름 괜찮은데! 하지만 10분 거리의 지하철역은 걸어도 걸어도 나오지 않았고, 계단이 아닌 출구를 찾으려니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왕복 3,000원에 모시는 저렴한 가구 배송이었지만 노동력이 예상보다 왕창 들어갔다.

  집이 가까워 질수록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이 너무 아픈데. 울상으로 언니를 쳐다보니 난리법석이었다. 머리가 반쯤 풀린 채 탁자를 이고 지고 헉헉대고 있지 뭐야. 아니 나는 그렇다 치고, 언니는 왜 길에서 테이블 들고 그러고 있어? 우리의 모습이 어이가 없어 꺽꺽거리며 웃었다. 지금 우리 여기서 뭐 하는 건데.

 

Q. 지쳤나요? A. 네니오.

 

  나는 종종 회사 동기가 ‘언니 인생은 대체 왜 그래’라고 할 만큼 이상한 에피소드를 만들곤 한다(회사 동료분한테 연락하려다 동료분 어머니한테 문자 폭탄 보내 보신 분? 티라미수 맛집인 줄 알고 들어간 카페에서 트로트 가수가 팬서비스 하려 다가오는 걸 보고 기겁해 거부해 보신 분?). 나야 그렇다 치고, 남자친구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왜 내가 하는 이상한 짓에 동참을 하는 건데? 나는 의자가 탐이 나서 들이댔지만 언니는 대체 왜 이러고 있냐니까 본인도 이유를 모르겠단다. 그냥 말을 잘 들어서 내가 가자니까 갔다나. 남자친구도 주로 그냥 내가 하자니까 하더라고. 하하.

  힘들어서인지 웃겨서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다 보니 겨우 집에 도착했다. 나는 쓰러져서 낮잠을 세 시간 잤다(그리고 일어나서 니트 쇼핑을 하러 갔다). 다음날 일어나니 온 몸이 뻐근했지. 무적의 백자매는 신년부터 힘 자랑을 했다. 1월 1일에 걸맞은 흥겨운 시간이었고요, 의자는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서 행복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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