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기의 신이 보우하사 내가 배정받은 사택은 전체적으로 별 문제가 없는 집이었다. 평범한 중층인 걸 알고 얼마나 신이 났던지! 해가 아주 잘 들지는 않지만 습할 정도로 어둑하진 않으니 괜찮았다. 그래서 싱크대 필름 시공과 도배장판만 하면, 입주 청소까지 마치면 집 세팅은 끝날 줄 알았는데..
싱크대 상부 플립장을 열었을 때 고정이 안되면 가스쇼바를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애초에 가스쇼바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면? 당연히 E26 사이즈의 동그란 전구가 들어가리라 생각하고 전등갓을 열었는데 생전 처음 보는 길쭉이가 꽂혀 있을 때의 당신의 반응은? 구축이라 세탁기 자리가 좁아 수전을 교체해야 하는데 수도관이 오래된 PVC관이라 설비 업자분이 다 쪼개질 수 있다며 GG 치고 퇴장하신다면? 주방 수전 코브라 사이즈를 재지 않아 새로 산 헤드가 자꾸 쿠당탕 가분수처럼 엎어진다면? 주방 수전을 교훈 삼아 분명 KC규격이라 적혀있는 샤워 헤드를 샀는데 샤워 호스와 또 사이즈가 다르다면? 특이한 위치에 있는 스위치를 옮기기 위해 전등갓을 열고 싶은데 당최 어디에 매달려있는지 모르겠고 전등 자체가 떨어질 소리를 낸다면? 전구를 갈아도 베란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버스 타고 나가야 겨우 도착하는 다이소에는 필요한 물건이 100%는 없고 이것 찔끔 저것 찔끔 있다면? 현관의 코일매트를 걷었더니 타일이 아니라 장판이 까꿍 나온다면?
진정한 집수리는 큰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임을 한 달 사이에 많이 배웠다. 그 사이 너는 내가 기뻐서 내는 ‘아아아~’와 절망의 ‘아아아으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거나, 이번 주말에 샤워 호스만 바꾸면 “수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은 다 끝날 듯싶다. 집을 편안히 살 만하게 유지하는 게 이리도 어려워서야 원. 엄마가 왜 몽키스패너를 사이즈 별로 구비하는지 이제서야 알았다. 반쯤 재미있고 반쯤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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