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1시에 방으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이 기관에서 근무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이런 문자는 처음이었고, 받았다는 다른 직원을 본 적도 없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잔뜩 겁을 먹었다. 업무 태만이라고 지적하고 싶으신가? 특별히 안 한 일이 없었다. 상사를 통하기엔 번거로운 지시를 내리려는가? 직급에 맞춰 소통하자고 6월에 본인이 직접 지시했었다. 아직 답변드리지 않은 업무 관련 질문이 절실히 궁금하신가? 문자로 재촉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어쨌거나 남은 건 이것뿐이니, 만나 뵈면 말씀드리려던 답변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나를 기다리던 기관장은 내가 업무 수첩을 들고온 걸 보고 웃었다. 내가 항상 지시를 내리니까 ㅇㅇㅇ선생이 수첩을 갖고 왔네. 그러더니 이달 말까지만 기관장을 하기로 했다고, 퇴직 소식이 공문으로 전달되기 전에 나에게는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신축을 위해 미친 듯이 달려온 지난날, 나와 발령으로 떠난 팀장만이 관장의 기대에 부응했다나.
중앙에서 상명하복에 익숙해진 선생님들과 지금의 기관에 오래 있는 선생님들의 태도는 몹시 달랐다. 본인이 권위적인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윗사람이라면 상명하복을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기관장이 우리 둘에게 인간적인 마음을 더 느끼신 것도 같다. 기관장의 키링인 게 자주 힘들었는데, 뒤로 빠지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왜 반항을 못하는 지 괴로워하기까지 했는데, 이런 친절한 마음이라니 원.
그분의 한탄과 고맙다는 인사와 그래도 잘 해냈다는 마무리와 앞으로의 당부까지 들은 뒤 그가 몸을 일으켰다. 적당한 선물을 하나 사셨나 했는데... 봉투를 주더라고. 생각도 못해서 깜짝 놀랐고, 참 고마웠다. 봉투가 없었어도 고마웠을 거다. 교수와 직원의 관계가 어떤지 서로 뻔한 직장이다. 그분이 나에게 고맙다고 말해주는 것 자체가 고마울 일이었다. 앞으로 이 직장에서 일할 30년 간 내게 이렇게 마음을 전하려 애쓰는 교수가 있을까? 높은 확률로 없다. 애초에 이렇게 많이 대화할 사람도 없을 테니까, 나의 노력이 고마움으로 돌아왔다는 점이 회사에 어울리지 않게 따뜻했다.
늘 좋기만 한 기관장은 아니었다. 세세한 것들엔 신경을 많이 쓰고 큰 일은 결정하기를 꺼렸다. 애초에 나서기를 싫어했다. 멋들어진 점심을 사주는 풍류도 없고 칭찬이 참 박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분이 진심인 건 알고 있었다. 그 나이에 그 성격인 분이 진심으로 잘 해내고 싶어 했고, 나 또한 그랬기에 어떻게든 이해했다. 본인도 힘들겠지, 잠이 안 오겠지… 폭언이나 비인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울컥 화를 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개관 프로젝트가 없었더라면 조용하고 내향적인, 정중한 기관장으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처음 왔을 때 “관장님은 절대로 화를 내는 분이 아니”라고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오늘의 대화로 내 직장생활의 한 시간에 마침표가 찍혔다. 이 일을 왜 하나 싶어 시간을 죽이는 시간이 아니라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시간. 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다 떠났다. 최선을 다해서 몸이 아프게 달렸고, 그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후회 없는 결과물이 완성됐다. 그러면 됐다.


다음 기관장은 홍보에 관심을 두실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쩐지 내 사무분장에 홍보가 적혀있어 벌써 마음이 아득하다. 이번에는 어떤 역량을 배워야 하나. 내 앞에는 또 어떤 산이 있나. 나는 그걸 어떤 태도로 넘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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