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고지를 찾아서
30대의 나는 무엇을 했나. 20대는 연도별로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은데 30대는 모든 게 뭉개져서 떠오른다.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사는 건 말이 안 돼. 뭘 하다 30대가 다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하기가 싫었다. 미래의 나를 위해 일기를 복습하며 매년을 정리했다.
정리해 보니 문제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보였다. 2020년에 미니멀리즘에 심취한 후 2022년까지는 새로운 모토에 심취해 있었다. 미니멀리즘과 재테크에 온 정신을 팔아 그에 걸맞은 생활 습관을 체화시켰다. 좋은 배움이었지.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자극이 없어졌다.

요즘 무슨 일을 했는지 자꾸 묻는 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매일 비슷한 일상을 반복했기 때문이고, 그 일상은 내가 그렇게도 만들겠다고 애쓴 루틴 때문이다. 결혼 후에 새로운 루틴을 정착시키기 위해 온 힘을 썼는데. 루틴이 없으면 불안해하면서 루틴을 지겨워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로 느꼈다.
미니멀리즘 이후 단조로운 시간이 이어졌다는 문제를 깨우쳤으니 이제 해결책을 생각해야 했다. 다음에는 무엇을 연마할까. 골똘히 고민해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혼자 카페에 앉아 고심하다가 우선은 1)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을 하루에 하나씩 적자 2) 두 달에 한 번은 남편과 여행 혹은 새로운 경험을 하자 3) 적극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서자고 마음먹었다. 여기에 앞으로의 5년을 투자할 새로운 목표가 떠오르길 바랐는데, 며칠을 생각해도 방향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5년이 그렇게 쉽게 정해지긴 어렵지!
2. 아보카도가 보여준 길
회사에서 일찍 돌아온 날, 지하철 역 앞의 과일아저씨가 아보카도를 무려 한 무더기 3,000원에 파는 걸 발견했다. 하나에 2,000원이어도 놀라지 않을 판에 다섯 개에 3,000..? 아보카도가 잘 후숙 되면 껍질이 부드럽고 어둡다는데 빛깔이 나쁘지 않았다. 가챠를 뽑듯 아보카도 소쿠리를 믿음으로 뽑아 들고 집으로 왔다. 다섯 개 중 두 개만 쌩쌩해도 성공이었는데 열어보니 놀랍게도 다섯 개가 모두 최상의 상태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또 외출할 일이 있는 남편에게 한 소쿠리만 더 사 오라고, 와이프가 샀는데 상태가 너무 좋아서 또 사 오라고 했다고 지령을 내렸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두 소쿠리를 5,000원에 주셨네. 둘이서 15개는 많아서 PT 선생님에게 인심을 좀 쓰고, 열심히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신나게 아보카도를 정리하면서 지난 몇 달간 내가 익힌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작년 11월의 나였다면 아보카도를 살 수 있었을까? 순식간에 냉동실에 넣고 가뿐히 뒷정리를 해내었을까? 나는 왜 매일 동분서주했으면서도 올해 내내 한 일이 없다고, 일궈낸 성취가 없다고 느꼈나?
그건 내가 나의 일을 일이라 인정해주지 않아서였다. 아직 부엌살림 솜씨가 미숙한 데다 하면 좋고 안 하면 그만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인데 무슨 가치가 있어. 나를 폄하하고 생산성이 없다고 몰아붙였더니 삶의 의미가 하나도 없어 보이게 되었다.
당치 않은 시각이었다. 나는 초보 주부 단계를 연마하고 있다. 동네에서 식료품을 사려면 어느 가게에 가야 하는지 알고, 어느 가게가 품질이 좋고 어느 가게가 저렴한지 체득했다. 온라인으로는 어느 플랫폼이 취향에 맞는지 찾았다. 식료품의 적정한 가격을 대략 배웠다. 모든 계절의 살림을 해볼 때까지 적정 가격은 계속 익힐 예정이다. 채소는 저마다 신선도를 어느 정도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계란에 새겨진 난각번호가 의미하는 바도 배웠다.
다음 단계는 식료품의 제철, 혹은 좋은 상태를 알아보는 눈이다. 똑같은 당근 라페인데 내가 만든 라페는 밋밋한 맛이 나고 결혼 4년 차 동료 선생님의 라페는 단 맛이 난다. 나도 몇 년이 지나 제철과 좋은 생산지를 알아보되 심지어 가격까지 좋음을 한눈에 파악하고 싶다. 그렇게 단계별로 노하우를 축적하는 게 하나의 생산이자 성취다.
이건 오로지 요리에 국한된 살림이다. 좁은 집인데도 살림살 것은 넘쳐만 난다. 나는 늘 더 좋은 정리법을 알고 싶다. 좋아하는 분야가 끝나면 청소, 빨래까지 능숙해지도록 익히겠지. 미니멀리즘 이후 새로운 삶의 기조를 찾았다고 느꼈다. ‘친환경 살림왕’이 나의 새로운 모토려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정진해 나가리. 무언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건 차차 작명해 보자고요.

3. 중세 여행은 짜릿해
네가 드디어 한국사 시험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이게 뭐라고 몇 년을 붙잡고 있었나? 나의 열심과 너의 열심이 다름을 진작에 알았지만 속이 터져나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열심히 한 너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이제 그만 공부해도 되는 걸 축하해!
주말 내내 너와 워테일즈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플레이는 너, 관전은 내가 했다. 멋진 우리의 용병단은 이틀간 틸트렌 지역을 평정하고 에도란으로 넘어갔다. 국경을 넘는데, 무슨 외국 여행을 떠나는 양 신이 나지 뭐야? 어두운 지도를 밝히며 온갖 지형을 돌아다녔다. 난파선을 탐험하고 절벽에 말뚝을 박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좋을까. 같이 신나게 놀 수 있어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말이 빨리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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