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하지현 선생님의 청소년 마음 관찰기 ‘지금 독립하는 중입니다’를 읽었다. 이제 내게는 지나간 시기인데다 10대 자녀가 있지도 않아 꼼꼼히 읽지는 않았지만 한 꼭지가 눈에 쏙 들어왔다. 청소년 시기에 별로 좋아하는 게 없는 상태보다 덕질하는 게 있는 상태가 훨씬 좋다는 부분. 꼭 공부만 좋아할 필요는 없다(실제로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덕질을 통해 몰입을 경험하는 거다.
이 이야기는 비단 청소년에만 국한될 조언이 아니다. 이제 주변인이 대체로 직장에 정착하는 나이가 되어 진로를 위한 자기계발(혹은 스펙 계발)에 몰두하지 않는다. 남은 건 취직 이후의 삶, 회사 밖의 삶인데 모든 주변 직장인이 일이 바쁘고 힘들어도 퇴근 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걸 싫어한다. 인생에 회사와 잠만이 있는 건 너무 허무하다나. 그런데 많은 사람이 특별한 취미가 없다. 그런 지인과 대화하다보면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 이 사람은 만나면 특별히 재미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네. 참 착하고 무해한 사람이다. 근데 왜 이렇게 지루하지.
공허함을 토로하는 말 외에 아무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 남는 시간에는 적당한 유튜브를 보거나 새로 올라온 웹툰을 보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이나 웹툰은 없고 그저 인기 동영상이나 인기 순 웹툰을 본대. 그러면서 너는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고 되묻는다. 남들한테 인기 있는 무언가 말고 좋아하는 걸 하라 하면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다니 나는 할 말이 없다. 갈 곳을 잃은 대화는 결국 겉핥기 식 연예인 잡담이나 연애, 쇼핑, 여행으로 흐른다. 듣는 나도 말하는 그도 딱히 재미가 없다. 지루한 말들이 오가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 자체가 지루해 보인다. 이렇게 단편적인 사람이었나. 공허함 다음은 우울감이어서 왜 사는지 모르겠다거나 회사에서 왜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까지 나오면 나는 세상이 버겁다. 그러게, 인간은 왜 살까? 이 고통은 뭘까? 이상하다. 난 재밌게 살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덕질을 해야한다. 현대인의 소외감과 외로움에 대한 솔루션으로 나는 감히 덕질을 추천한다. 이것은 중독이 아닌 몰입을 추천하는 것임을 명확히 밝힌다. 덕질만큼 시간을 충만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게 없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세상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데, 기왕이면 재미나서 눈 깜짝할 새 흐르는 시간을 경험하는 게 좋지 않나. 스스로 자족할 수 있게 되니 독립심 향상에도 그만이다.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의지할 필요가 없다(‘뭐해? 나 심심해!’같은 초라한 말을 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럼 대체 무엇을 덕질하냐고? 남들이 듣고 ‘이걸 왜?’란 답을 하는 무엇일수록 좋다. 무용한 일에 힘쓰면 무용하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꽤나 즐겁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최고 진리인 양 주입받은 현대인이라면 무용한 일을 하며 묘한 죄책감을 느낄 텐데 Guilty pleasure의 원초적 짜릿함은 두뇌 저 깊숙한 곳을 찌른다. 지구에 발 디디고 사는 이들이 각자 좋아하는 대상 하나 쯤은 있어야 세상이 밝아질 테다. 진정으로 대상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가 발행하는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덕질을 하다못해 한 권의 책으로 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물론 그 안의 모든 마음에 동의할 순 없다. 우리는 남이니 ‘이걸 왜?’부터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어쩔 수 없는 덕질의 본성이다). 무용해 보여도 읽다보면 사소한 지점이나마 스스로 덕질할 계기를 찾을 수 있게 될 거다(혹은 아무튼 시리즈를 덕질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
우리 모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하면 000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라는 말을 남겨보자. 제발 공허하다고 말하면서 남의 취미 보고 그건 왜하냐고 묻지를 말아 달라. 몰입하면 공허하지가 않다니까! 스스로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할 건 비단 청소년만이 아님을 2030 사춘기 남녀를 통해 배우고 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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