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도넛이 정말 맛있는 '카페 노티드'를 찾아갔다. 지인이 사다 주어 먹고 한 입에 반했었는데, 인스타에 올리면 예쁠법한 팝팝 컬러감의 인테리어가 커스터드 도넛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갓 만든 도넛을 포장해서 나오려다 절인 토마토가 든 프레첼에 홀려 자리를 잡았다. 커피랑 빵을 만족스럽게 먹고 있자니 앞자리에 앉은 엄마와 두 딸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는 핑크 바지와 도트무늬 레이스의 티를 입고 형광펜 색깔이 다채롭게 들어간 샤넬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샤넬에서 저런 디자인도 나오는군. 귀걸이마저도 폼폼으로 만든 도넛인 엄마를 보자니 젊은 시절에 얼마나 화려한 멋쟁이였을까 상상하게 됐다. 엄마는 가게를 배경으로 작은 토트백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참이었다. 가방은 족히 10가지 색으로 구성된, 노티드 도넛과 찰떡같은 분위기의 디자인이었다. 블로그 마켓이라도 하나? 가게 구석구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또 찍는 모습을 보는데 사진의 대상과 스스로의 스타일이 매우 잘 어울려서 일이 적성에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를 따라온 두 딸은 엄마가 사진을 끝없이 찍는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사춘기가 막 시작된 듯한 첫째 딸은 아이폰을 활용해 사진을 찍었다. 엄마의 목적이 가방이라면 아이의 목적은 예쁜 자신이었다. 괜찮은 배경을 찾아다니는 딸의 모습에서 사춘기 특유의 건성건성한 분위기가 흘렀다. 초등학생인 것 같은데.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은 벌써 저렇게 옷을 잘 입네. 사진을 다 찍고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동생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둘째 딸은 처음부터 사진에는 관심이 없었다. 언니와 두어살이나 차이가 날까 싶었는데 성숙한 언니와는 달리 카페에 비치된 그림 종이에 색칠을 하는 어린이였다. 볼살이 통통한 모습이 어쩌면 집에서 엄마와 언니의 다이어트 공격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앞자리에 마주 앉아도 별로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는데, 언니가 색연필로 그림을 건드려 부아가 오르는 상황을 보니 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저런 시비가 일상이겠지. 평소에 언니와 잘 지내느냐고 질문 한 마디만 하면 불평이 줄줄 나올 것 같았다.
딸들이 뭘 하거나 말거나 엄마는 세팅된 빵과 음료를 두고 여전히 가방 사진을 찍었다. 그림도 완성했겠다 할 일이 없어진 둘째는 결국 기다리다 지쳐 먹으면 안 되느냐고 물었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엄마는 두 딸과 그림을 사진의 배경으로 담고 싶어 했는데, 이 카페에는 아이를 위한 그림 종이가 있다는 말을 넣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엄마는 언니에게 함께 그림 그리는 자세를 취해보라 했다. 이게 무슨 횡재야. 언니는 본격적으로 동생의 그림에 손을 댔고 동생은 애써 공들인 그림이 망가지는 걸 지켜보았다. 아이는 결국 짜증을 냈다.
둘째는 사진을 좋아할 수가 없어 보였다. 엄마는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음식도 주지 않고 괴롭히는 언니를 심지어 부추겼다. 자신을 사진에 담지 말라고 항의했는데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사진에 찍히는 건 포기한 채 그림을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는 자매에게 엄마가 하는 말은 고작 '너네 이렇게 싸우면 그대로 올려야겠다'는 엄포였다. 이 싸움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기는 할까. 나는 고작 30여 분을 지켜보고도 걱정이 됐다.
두 딸은 격동의 사춘기를 보낼 것만 같았다. 언니는 이미 공격적이었다. 겨우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서도 셋은 대화가 없었다. 저 시기의 나는 언니와 엄마와 재잘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엄마는 딸에게도 빵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음료를 홀짝이며 핸드폰 사진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이 어디에서 더 찍어야 할 지를 가늠하는 모습이었다. 마켓의 주인장으로써는 아주 훌륭한 태도였다. 저렇게 열심히 운영하는 마켓이라면 나름의 사업이 잘 운영되고 있는 중일 테다.
자꾸만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 희생을 하고 있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저 두 딸이 자라서 엄마와 갈등을 빚게 되면 엄마는 대체 네게 부족한 게 무엇이었느냐고 화를 내겠지. 아이들은 핫한 좋은 곳은 다 가보게 될 테고 그 모든 곳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게 될 거다. 엄마는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고 먹고 싶다는 음식을 넉넉히 챙겨주었다. 아이들이 싸워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한두 마디의 말로 타이르는 부드러운 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속에 첫째의 체념, 둘째가 겪는 몇 차례의 실망과 움츠러듦이 초면인 나에게도 너무나 잘 전해졌다. 안쓰러웠다.
SNS 마켓이나 주부의 블로그에서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자녀의 사진을 볼 때마다 저 아이들은 사진이 올라가는 걸 좋아할 지 궁금했었다. 나의 사소한 목격이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지도 않겠지만, 최소한 아이가 엄마를 원할 때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막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보듬어주기를 바랄 때를 놓치면 나중에 큰 파도로 밀려올 텐데. 엄마가 아이들의 얼굴만은 많이 노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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