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을 기준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첫 부서를 떠나자니 회사 생활의 한 장(章)을 마무리하는 기분이 든다. 새 부서에서 근무한 지도 2주, 기억이 다 지워지기 전에 첫 부서에서 배운 점을 정리하려 한다.
1. 연구지원 관련 지식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부서였다. 전공 수업 시간에나 들어봤던 인용색인이니 뭐니 하는 개념을 열심히 외웠다. 덕분에 1년이 지나고부터는 꽤 능숙하게 전화를 받고 교육을 했지. 대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원생도 자료 찾는 법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구글이냐고!). 이제 일정 수준 이상의 연구 자료를 얻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검색의 시작점 정도는 잘 안다. 직접 구성한 해외의 선행 연구 찾기 교육이나 Men 교육도 내 자부심이다.
2. 뻔뻔한 발표 스킬
대학생 시절 많은 팀플을 했지만 아예 모르는 관중 앞에서 발표할 일은 없었다. 이름은 몰라도 수업시간에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나와 비슷한 연령 혹은 더 높은 연령대의 이용자 앞에서 어설프게 준비한 내용을 당당하게 발표하기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나도 점점 뻔뻔해지더라고. 나이건 학벌이건 최소한 지금 이 방 안에서 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마구 쎈 척을 했다(개그우먼 장도연의 ‘지금 여기 다 *밥이다’ 전법과도 같은 마음가짐). 발표할 때 말하는 속도가 빠르다는 단점도 오랜 시간을 들여 고쳤는데, 내가 내용을 줄줄 외우고 있는 수준을 넘어가서 체화가 되어야만 속도까지 조절된다는 걸 알았다. 낯선 사람 앞에서 발표하기는 여전히 떨리는 일이지만 어떻게 하면 긴장한 티를 감추고 완벽히 잘 해낼 수 있는지 체득했다는 점에서 굉장한 소득이다.
3. 이용자 응대법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입사 후 이용자를 직접 만나는 자료실에 가고 싶었지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과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문의가 많이 오는 부서에 있어 이용자 응대 상황을 제법 경험할 수 있었다. 부서에 발령이 나고 두 달쯤 지났을 때, 반복적으로 같은 민원(이라기에는 안되는 부분을 억지로 해달라고 조르는 볼멘소리)을 전하는 도서관에서도 아주 유명한 이의 전화를 받았다. 부끄럽게도 내 언성이 점점 커져서 결국 실장님이 달려와 대신 전화를 받아주었지. 유명한 사람이거나 말거나 내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시달렸는데, 2020년 연말에는 내 뒤로 입사한 두 명의 동료가 곤란할 때 내가 대신 나서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안된다’는 대답을 부드럽게 전할 수 있게 되다니. 진짜 사회인이 된 기분이 든다.
4. 자료 디자인 구성
대학교 시절 발표 자료 담당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나다. 디자인 감각이라고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만 여겼던 나란 말이다. 그런 내가 영상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다니 정말이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청천벽력이라고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온갖 피피티 제작 관련 자료를 찾았다. 다양한 이미지 제공 사이트, 피피티 블로그, 이모티콘 사이트, 홈페이지 디자인 샘플 사이트, 색 조합 사이트, 심지어 누끼따는 사이트까지 동원할 수 있는 온라인 자료는 모두 동원했다. 퇴근 후 유튜브를 보면서도 멋진 화면은 다 저장했다. 그래도 처음의 결과물은 영 좋지 못했는데, 심지어 실장님이 보고 상갓집 분위기라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어째서!). 수차례 수정을 거쳐 겨우 올린 영상이 천천히 쌓여갔고 이제 내가 생각해도 많이 발전한 디자인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엄청난 예술적 센스를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영 부끄럽지는 않은 정도? 발전상이 한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5. 책임 있는 자세
회사 생활을 시작한 2016년 이후 가장 늘어난 능력을 꼽아보라면 단연 회피 스킬이다. 일만 생기면 네가 하라며 떠미는 상사의 등쌀에 밀리는 줄도 모르고 시키는 일은 다 했던 어느 시절을 지나며 나는 나서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 회사에서도 처음에야 눈치가 보였지만 연차가 쌓여 부서의 막내가 아니게 되자 아무도 내게 적극적인 자세를 (대놓고) 요구하지 않더라. 몸이야 편했지만 이런 내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이렇게는 하지 말자. 회피를 그만둔 건 다 실장님의 멋진 모습 때문이었다.
처음 이 부서에 발령이 나고 실장님은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어려운 일을 해결하라고 실장이 있다'는 걸크러쉬 멘트를 날려주었다. 이 말이 내게 이렇게나 오래 남는 이유는 저 말을 근무 내내 지켜주셨기 때문일 테다. 실장님의 강인한 우산 덕에 불합리한 일은 최대한 피할 수 있었고, 해야 할 일은 왜 해야 하는지 꼼꼼히 납득하며 수행할 수 있었다. 실장님에 대한 믿음은 점점 쌓여서 종래에는 당장 이해하지 못하는 일도 실장님이 지시하면 일단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해). 이렇게 신뢰하는 어른에게 나도 좋은 직원이 되어주고 싶어 몸을 빼지 않게 되었고, 이제와 생각하면 안 해서 후회할 일은 있지만 해서 나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도 10년쯤 지나면 누군가에게 이런 영향을 줄 수 있게 될까. 애인만 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란 법은 없다. 멋진 상사도 충분히 가능하다.
6. 여유가 조급증보다 낫다
원래 성격이 급하다. 매사 빨리 처리되기를 바라고 처리되지 않은 일이 남아있으면 찝찝한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업무도 마찬가지여서 할 수 있는 일은 재빨리 해치워야 속이 시원하다. 그래서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한다. 내가 알아서 해치워버릴 수 있으니까.
업무를 진행하다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대체 나는 과한 스트레스 폭탄을 맞았다. 시간을 두고 놔두었으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도 동동거리면 큰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옆에서 괜찮다 다독여도 혼자 종종거리기를 얼마쯤, 느긋하게 거리를 두면 난데없이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전혀 상관없는 조언에서 실마리가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업무에 기한이 있는 건 느려짐을 막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급함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더라고. 기한 안에서 여유롭게 진행하면 뭐든 급할 때보다 훨씬 꼼꼼해진다. 차분한 성격의 동료를 보며 배운 귀한 교훈이다.
7.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자
무능한 사람이 되는 상황을 정말 싫어한다. 최소한 평균은 했으면 좋겠고 어지간하면 가장 잘했으면 좋겠다. 학교다닐 땐 이 마음 덕에 높은 등수를 유지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회사라는 사회에 들어온 뒤 내가 최고여야 한다는 욕심을 점점 내려놓게 됐다. 세상에는 일잘러가 많다. 천성적으로 조직 친화적인 사람도 있다. 기를 쓰고 자료를 만들어도 동료의 자료가 낫고, 최대한 센스를 발휘해도 동료의 영상이 더 예뻤다. 그럴 때 이기려고 애쓰는 게 능사가 아니더라고. 적당한 수준으로 손 내미는 법을 아는 게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임이 들어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듯 어쩌면 누군가는 내가 손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도. 2년 반 동안 노력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회사 생활에서는 도움 요청하는 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 까지는 겨우 배웠다. 이제 더 자연스럽게 도움 요청하는 법을 배워나가면 된다.
8. 유연한 관계의 힘
I 찬양글도 올리는 내게 혼밥을 먹거나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는 일상은 천성적으로 편하다. 근데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만 하면 까딱하다 유야무야 외면당한단 말이야. 협조가 잘 안 되는 누군가로 구성원에게 인식되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 수 있으려면 평소에 관계를 잘 다져두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입 장벽이 낮은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소극적인 사람만 모여있다는 부서 평가를 들은 몇 번의 경험 덕이기도 한데, 겪어보면 우리 부서원 모두 모난 사람이 없었다. 알고 보면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을 바깥에는 마치 고고한 척하는 모양새로 비치기도 했던 모양이지.
굳이 필요 없으니 참여하지 않을 일도 굳이 참석하면 누군가가 마음 편해질 수도 있다며 나서는 걸음이 필요하다. 나서느냐 마느냐를 내가 (편하게) 결정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그렇게 다져야겠다고 조용히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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