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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1.1.24. 보풀이 나풀나풀

by 푸휴푸퓨 20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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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풀제거기를 샀다. 처음 산 보풀제거기는 아니다. 생활잡화점에 갔다 충동적으로 산 보풀제거기는 단 한 번 작동시켜보고 내내 방치하다 버렸다. 보풀제거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었지만 샀다. 디에디트의 어느 리뷰가 너무 믿음직해서 신뢰가 하늘 끝에 닿은 덕이다. 마침 보풀이 빼곡한 니트가 두 벌이나 있었고.

  다양한 옷을 입진 않아도 가진 옷을 잘 손질해서 입고 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니트를 참 좋아하면서도 손질하는 방법은 몰랐다는 거. 보풀이 일어나면 어떻게든 견디다가 끝내 참지 못하면 버렸다. 옷을 버릴 때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모든 니트가 보풀 때문에 버려지리란 결말을 알고 있으니 니트를 입는 행위 자체가 죄였다. 기호와 신념 사이의 이 거리감! 그랬던 제가 아이프리 FX200을 만났고요. 네. 구원받았습니다.

바로 저 노랑이가 fx200이다

  어느 유튜버의 추천만으로 물건을 살 결심을 하지는 않았다. 사실 소형 가전 구입이 또 미니멀리즘이나 환경 보호의 대척점에 있잖아. 대개 몸체는 플라스틱에 여기저기 다양한 재질의 부품이 들어간다. 버리려는 순간 일반쓰레기가 한가득에 포장재나 비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산 것은 수천개의 리뷰와 어느 문구 때문이었다. 세탁소에서 보풀 제거하려면 한 번에 15,000원인데 두 번이면 그 값이 나온다는 말. 세탁소에서 보풀 제거를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생전 처음 알았지만 어쩐지 안사면 손해리란 기분이 솟구쳤다.

  기계의 성능은 굉장히 좋아서 이제 1월이지만 벌써 올해의 잘 산 물건으로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니트 두 벌을 성공적으로 살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세탁소 어르신이 보풀 제거에 15,000원이나 받으셔야 마땅한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체로 남이 하는 일을 평가할 때 여느 기계가 그 직업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보풀 제거도 마찬가지였다.

  보풀을 깎다 보니 보풀을 깎는다는 건 실에 붙은 미세한 섬유들을 떼어내는 작업임을 알았다. 이걸 많이 깎으면 실이 얇아지거나 보온성이 떨어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 그렇다면 이걸 최대한 민둥산으로 만든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었다. 얼마나 깎고 어디서 멈추느냐의 결정이 중요한데, 고작 몇 벌의 니트만 만져본 내가 최적의 선택을 할 리 없었다. 수백, 수천 벌의 옷을 만져본 세탁 장인만이 최고의 결정을 할 수 있다. 누군가 직업이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하우가 있다. 그걸 모르고 기계값만 따져서는 될 일이 없다.

  보풀제거기를 동글동글 돌려가며 반복적인 일을 하다보니 괜한 생각이 떠올랐다. 스타일러의 등장으로 많은 세탁소가 걱정을 했겠구나. 일주일에 두 벌 이상의 양복을 드라이하는 우리 집은 단골 세탁 가게의 VIP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 집은 곧 스타일러를 들일 계획인데, 세탁소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우리 집 앞에서 '세-탁'을 외치시지 않을까(엄마가 문밖으로 나가 굳이 저희 집이 스타일러를 사서 이제 드라이를 덜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시는 모습도 이상할 테다). 나는 스타일러가 생긴다고 기뻐하기만 했지 다른 이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리란 고민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솜씨 좋은 세탁 장인은 끝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소수의 기술임을 활용해 서비스에 합당한 값을 받을 수 있겠지. 많은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소수의 스페셜리스트가 살아남는 세상이 정말로 눈 앞에 왔다. 어디 세탁 산업만 그러하랴. 보풀제거기를 뿌듯하게 정리하며 내 미래는 어떻게 되려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FX200을 부수며 러다이트 운동이라도 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아주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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