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길을 찾을 수 없음을 핑계 삼아 멈추고 자책하는 것은 편할 뿐 무익하다.
유튜버 히조(heejo)의 영상을 보다 '지구용 레터(구독은 여기!)'를 알게 되었다. 여러 뉴스레터를 받아보지만 환경 관련 레터는 생각도 못했지 뭐야! 바로 구독한 뒤 매번 관심 있게 읽고 있다. 덕분에 이 책도 알게 되었다(타깃층이 찰떡같은 두 콘텐츠의 콜라보레이션이로고). 제로웨이스트를 하면 늘 내가 잘하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데, 이럴 때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큰 도움이 된다.
"예뻐서, 예뻐서 주는거야."
'예뻐서'라는 말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하셨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돌아서는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열 개쯤 떠올랐다. 내 얼굴이 예쁜 걸까, 아니면 비닐을 거절한 게 예쁜 걸까? 양쪽 다 가능성이 큰(?),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비닐 포장 없이 채소를 사려다가도 다양한 이유로 나를 합리화하며 포장된 채소를 산 기억이 많다. 이유의 근원은 사실 용기가 부족해서다. 튀고 싶지 않아서, 한 번 더 말을 걸기가 어려워서, 유난스럽다고 할까 봐. 이런 내게 상인들과 긍정적인 소통을 하는 저자의 모습은 마냥 부럽기만 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넘어 무쇠의 매력에 듬뿍 빠진 나는 국산 안성주물에서 나온 작은 사각 팬도 하나 들여 잘 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첫정을 준 롯지 10인치 팬을 가장 사랑한다. 우리는 서로를 길들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의 동반자가 될 '반려 프라이팬'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면 절로 반려 물건을 만들게 된다. 나는 미니멀리즘과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게 되면서 아주 깐깐한 소비자가 됐다. 무슨 물건이건 최소 몇 년 이상의 반려자가 될 가능성이 큰데,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가는 두고두고 그 부분을 후회하게 된다. 쉬이 버릴 수도 없으니 시작부터 잘해야 할 수밖에. 고민이 어려우니 소비가 귀찮아져서 자연스럽게 구매욕이 사라지게 됐다. 좋은 선순환이다.
재래시장은 늘 옛 모습으로 멈춰 있는 올드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다. 이곳은 가장 신상에 민감하고 지난 것은 가차 없이 치워 버리는 '프레타포르테 런웨이'다. 게다가 오로지 한정판만 짧게 취급한다. 손님들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가장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다. S/S시즌으로 쫙 깔린 매대에서 지나간 F/W시즌을 찾고 있는 것만큼 촌스러운 애티튜드는 없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진짜 중요한 정보는 신상 옷, 연예인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제철 음식과 특산품, 기가 막힌 요리법, 맛있는 과일농장 연락처고 생각한다. 시장의 김 팝업스토어 이야기는 절로 공감이 됐다. 나도 금요일만 나타나는 순대볶음 아저씨를 애타게 기다리는 터라 웃음이 났지. 저자의 다양한 요리 이야기를 보며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나는 비건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라고 말하지만 결국 핑계다. 공장식 축산은 정말 싫은데 아직도 유난스럽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이기적이기 짝이 없지. 완벽한 한 명보다 불완전한 여러 명이 낫다는 말을 믿으며 홀로 먹을 때만 채식을 고른다.
애벌레는커녕, 벌레 먹은 구멍 하나 없이 일정한 크기로 매끈하게 빛나는 채소들은 사실 굉장히 인공적인 결과물이다. '유기농'이라는 딱지가 붙은 작물일지라도 말이다. 마치 루이 14세의 정원과 같다. 깎은 듯 잘 정돈된 그 정원을 거니는 누군가가 '자연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나는 지금 자연 그대로를 만끽하는 중이구나.' 착각한다면 우스운 모습일 것이다.
애호박이 원래 일정한 굵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던 때, 인큐베이터 애호박이 아닌 자연스러운 애호박을 사려고 시장을 돌았다. 딱 한 가게에서 찾았지만 스티로폼에 랩이 씌워져 포장되어 있었다. 단호박에 원래 애벌레가 많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단호박은 농약을 치지 않아 좋다는 엄마의 말은 다 무엇이었나!?). 나는 못난이 채소가 원래 채소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를 알려준 온라인 채소 상점 '어글리어스마켓'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다. 못난 채소를 소량으로 여러 개 모아 정기적으로 배송해주기도 하고, 팔리지 않으면 폐기 처분될 채소를 구해내기도 한다. 못난 채소가 특별히 팔리지 않게 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는데. 도시에서만 산 사람이 점점 많아지니 자연을 모르는 사람도 늘어만 난다. 나부터도 특이한 모양의 채소는 생경하기만 하다.
자본주의 세상에 사는 우리 모두 '가성비와 합리적인 소비는 옳다'라는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중략)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은 명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사실은 그리 소중하지 않은 허상의 이미지에는 높은 가격을 매기지만, 지구의 바다와 땅을 오염시키고 아주 미세한 모습으로 되돌아와 사람의 몸까지 위협하는 플라스틱에는 하찮은 가격을 매기는 이상한 신(神)이다.
타일러 라쉬의 '두 번째 지구는 없다'에서도 '경제 활동의 외부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게 환경 문제의 핵심'이라는 말이 나온다. 초등학생 때 물과 공기와 같은 공공재는 돈을 주고 사지 않아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라 배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지. 환경에 취약한 누군가는 물과 공기를 누릴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 세계가 잘못된 걸 알면서도 자본주의의 피라미드에서 조금 더 위칸을 차지하고 싶다. 한 칸이라도 오를까 싶어 월급을 모으고 투자를 한다. 투자한 회사에서 무슨 활동을 하는지까지 고려하면 수익을 낼 수 없다. 플라스틱 하나 줄이는 것보다 투자를 골라서 해야지, 하다가도 이익률을 계산하면 눈을 흐리게 뜬다. 나란 인간의 한계다.
이런 것까지 글로 쓰면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을까 싶어서 쓰기 주저했거나 생략하려던 이 마음들이 모여 진짜 제로웨이스트가 된다.
개인이 일상 속에서 환경을 위한 미시적 노력을 하는 것은 바로 그 공감대 형성에 의의가 있다.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의 생활을 하셨다고 만민이 스님이 됐다는 기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분의 삶에 감화받은 사람들이 조금 더 선한 길을 걷고자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제로웨이스트나 비건 같은 극단적인 길 역시 그걸 하는 개인이 미미한 오염을 줄여서 지구를 구한다거나 모든 인류를 욕망 없는 수행자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더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의문, 작은 감동을 선사하는 일종의 '행위 예술'로서의 의미는 충분하다.
제비(제로웨이스트+비건)에 대한 에세이는 제로웨이스트나 비건에 대한 새로운 내용이 읽고 싶어 보는 책은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와 같은 불편을 겪고 있는지 공감하고 서로의 아이디어에 감탄하며 읽는 책이다. 저자는 내가 생각만 하고 실천은 하지 못하는 부분을 전부 실행하고 있을뿐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가르쳐준다. 심지어 다양한 제로웨이스트 책을 읽었지만 발견하기 어려웠던, '구질구질함'에 대한 고백까지 있다. "거지와 환경운동가는 구분되지 않는다더니!"라는 농담을 실제로 들은 사람이 나 말고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있을까? 제로웨이스트를 한답시고 애쓰다 보면 필연적으로 구질해진다. 그런 내가 초라하지 않게 버텨주는 기반은 이것이 도움이 되리란 믿음 뿐이다.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바꾸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나는 안다. 잠깐 눈감으면 별 것도 아닐 일에 공을 들여야 하고, 이래 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현타도 견뎌야 한다. 그럴 땐 함께 이겨내 보자고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의미가 있다고 외쳐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큰 힘이 된다. 처음 알맹상점이 생겨날 때 응원했던 마음이 이제는 동네에까지 제로웨이스트 가게가 생겼다는 반가움으로 변했다. 제로웨이스트를 주제로 한 책도 많아졌다. 언젠가는 이 주제가 사라지는 날이 오면 좋겠다.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아서, 일상이 되어서 이제는 특별히 책으로 읽지 않아도 될 만큼 평범해질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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