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 친구가 임신을 했다. 가족 외에 처음 말한다고 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너의 결혼에 내가 얼마나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최선을 다해 방정을 떨어 보았는데, 과연 괜찮았을지 원.
자연스레 친구들과 임신 이야기를 했다. 30대의 임신은 상상처럽 쉽게 되지 않는단다. 배란기도 딱 반나절이고 좋은 때에 정자가 들어가도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30%대라나? 달라진 우리의 대화 주제가 웃기기도 하고 도움되기도 했다. 위험하다고 조심할 게 아니라 위험한 순간에 맞춰 밤낮으로 생산에 매진해야 한다니.
친구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불안하다고도 했다. 상상하면 나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오염되는데 왜 아기를 낳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마음이 있었다. 이제 이해가 된다. 아기는 아기고 환경은 환경이다. 어떨지 궁금한 아기 얼굴을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한 번은 보고싶다. 이기적인 욕심을 왜 참아야 할까 싶다. 삶은 고통인데, 나를 위해 작은 너에게 고통을 주어서 미안하지만, 내가 행복하고 싶어서.
언니도 임신을 하고 싶어 한다. 언니와 때아닌 엄마 경쟁을 해야한다며 가족이 다같이 웃기도 했다. 순서는 밀린 것 같지만, 나도 어쨌든 뭐든지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위험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접수 완료.
2.
회사에 출근하기 싫다. 격렬하게 출근하기 싫다. 동태 눈을 하고 흐리멍덩하게 나오기도 지칠만큼 미치도록 출근하기 싫다. 삶을 이렇게 사는 건 재미가 없다. 아까운 내 시간을 짓밟아 버리기 싫다. 그저 싫다 싫어 염불만 외다 겨우 떠올렸다. 회사에 출근해야 할 재미있는 이유를 한 가지 만들어봐야겠다고. 이 생각을 떠올렸다는 자체만으로 조금 더 출근할 마음이 났다.
회사 일에서 자아를 찾을 생각이 전혀 없어졌다. 그럼 나는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나. 내 인생의 다음 프로젝트는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그래서 내가 요즘 아기를 생각하나 싶기도 했다. 그런가? 생각이 이어지니 내 인생이 재미없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모든 기대를 몰빵하는 엄마가 될까봐 걱정이 됐다. 그럴 법한 일이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의 내용을 쓰고 2주를 묵혀두었다. 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풀숲같던 회사 일에 어느 정도 길을 냈다. 의지하던 상사가 없다면 홀로 우뚝 서면 된다. 살아갈 방향을 구하니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이직따위 없는 회사에서도 쌓아갈 능력이 있기는 하다. 커리어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지만, 매년 내가 한 일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나도 차곡차곡 성장해 왔다. 일단 그렇게 믿는다.
3.
몇 년 전 옷장 한 개로 옷을 싹 정리한 후 아직까지 양을 유지하고 있다. 집에 놀러온 지인들이 놀라기도 여러번인데, 그럼에도 때때로 버릴 옷이 나온다. 이건 보풀이 많이 일어서, 이건 그 와중에도 입지 않아서. 꼭 필요한 옷은 사기 때문에 버려도 일정량 이하로 수가 줄지는 않는다.
헌 옷은 늘 관심이 가는 주제다. 못 사는 나라에 기부한다는 마음이 착각인 건 안지 오래다. 청바지가 유발하는 오염이나 재미로 바꾼 핸드폰이 없애버리는 고릴라의 서식지를 잊지 않는다. 소비 욕구가 차오르다가도 꾸역꾸역 참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래도 쓸데 없는 옷을 아예 사지 않았다고 말하긴 어려웠는데.
무심코 뉴스레터를 읽다 티셔츠 한 장이 매일의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보다도 나쁘다는 사실을 알았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옷 중에 제일 간단한 옷이 매일의 테이크아웃과 같다면, 더 복잡한 옷은 대체 얼마나 심각한 걸까. 티셔츠 한 장이 이정도라면 다른 것들은 또 어떨까.
(내게도, 세상에게도) 의미 있는 소비만 해야 한다. 나의 무심코는 언젠가 내게 다시 돌아오리라. 세상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고, 문득 지하철에서 생각하였다.
무심코 버린 모직코트 한 벌, 종이컵 912개 버린 것과 같다
① 헌 옷의 경로기후변화행동연구소·한겨레21 ‘헌 옷’ 탄소발자국 측정… 고탄소 원단 사용·무거운 옷일수록 탄소발자국 커
h21.hani.co.kr
4.
운동을 하지 않은지 어언 세달째였다. 신혼집으로 이사를 한 후 새 헬스에 등록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겨우 등록을 하고서는 딱 한 번 갔다. 피티도 아닌데 하루 오만 원짜리 운동을 하셨어요 회원님? 아침이 너무 추웠다는 핑계도 떠오르지만 그냥 게을렀던게 맞다. 늘 그렇듯이.
일주일에 한 번 하는 PT로는 불씨를 다시 지피기 어려웠다. 나를 보는 선생님의 근심이 늘던 와중이었다. 주말에도 PT를 받으러 가는 날, 드디어 너를 데려가게 됐다. 너도 참 운동을 하지 않았지. 온갖 곳의 근육이 짧아진게 나에게도 느껴져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다. 선생님, 이 친구도 구원해주세요.
너의 PT를 기다리느라 오래간만에 길게 운동을 했다. 전날에 이어 연달아 이틀 운동을 해서일까, 유산소까지 완벽하게 열심히 해서일까. 익숙한 활력이 돌아왔다. PT를 하고 나온 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기회다 싶어 함께 PT를 다니자고 꼬셨다. 사르륵 넘어오는 걸 보면 상당히 괜찮았나보다 싶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 운동이 싫다. 운동은 무엇보다 내 마음을 가장 그늘지게 하는데 와중에 내 삶을 밝게 만들어준다. 내다 버릴 수가 없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인 걸 알면서 외면했다.그 값을 묵직한 몸으로 톡톡히 치뤘다. 늘 하는 신년 다짐이어도 좋아. 2025년의 운동을 이제 다시 시작한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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