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인문학'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책은 대체로 좋아하지 않는다. 취업 시장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굉장히 천대받는 것과는 달리 책 시장에서는 인문학이 떠오르는(이미 한참 떠올라서 식상해진) 대세라서 말이다. '0000 인문학'은 뭔가 숙고 없이 만들어낸 시류에 편승하는 책이란 편견이 있다. 제목에 인문학만 들어있으면 무작정 읽어야 할 것 같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또 인문학이야?' 싶은 마음도 들고, 그런 제목 달고 있는 책 치고 크게 마음에 들었던 책도 솔직히 없고.
이 책도 제목을 좀 바꾸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과는 전~혀 상관 없이 아주 잘 읽었다는 건 확실하다. 일단 많은 인문학 서적들과는 달리 굉장히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쉬우면서도 내가 옷에 관해 막연히 하던 생각들을 잘 정리해 인문학적 해석이 달아주어 아주 만족스럽다. 안개가 걷힌 기분이기도 하고, 시류가 이런데 어떻게 해야 똑바로 행동하는 것인지 다시 되새기게도 해 준다.
여러가지 꼭지가 있고 다 공감이 가지만 현재 나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건 단연 패스트패션이다. 한국에도 다양한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있지만, 정말 딱 한 철 입고 버리는 옷은 아닌 것 같다. 뭐랄까, 딱 한 계절 입을 수 있는 소재의 옷은 일단 사지를 않으니까. 내가 보기에 한 철만 입을 수 있다는 말이 가장 딱 어울리는 브랜드는 영국의 프라이마크다. 패스트패션이란 말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준 곳이었고 어찌나 품질이 일관되게 나쁜지 사회 암적인(?) 브랜드라고까지 생각했다. 가격은 무지막지하게 싼데, 정말 세탁 한 번에 엉망이 된다. 날씨가 우리와는 달라서 세탁 자체를 자주 안하는 나라라는 걸 감안해도 딱 한 번의 세탁에 다 망가져버리는 옷이라면, 정말 한 달정도 입다가 버린다는 뜻 아니냐고! 한국인들은 구매대행까지 해서 입기도 하는 걸 알고 기절 초풍할 뻔했다. 절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옷이다. 버려지는 프라이마크 옷들이 뿜어내는 공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패스트패션도 그렇고, 옷이라는게, 패션 산업이라는걸 돌아가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은 누가 뭐라해도 유행과 소비일 것이다. 문제는 누가 유행을 만드느냐는 거다. 책에도 나와 있듯이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 몇 명이 고심해서 만들어낸 그 유행을, 물론 지적 가치는 있다 해도, 도대체 왜 우리가 이렇게 기를 쓰고 따라가야 하는지? 옷, 악세사리, 화장품 등등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한 때에는 한 달에 몇 권씩 패션 잡지를 챙겨보곤 했다. 하지만 점점 지치더라고. 솔직히 내가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결국 따라만 가야하는건데, 분명 지난 시즌에 제일 예쁘다던 옷이 이번 시즌에는 철이 지났다며 아직도 입느냐는 듯한 물음을 던져대니 뭐하자는 건지 싶었다. 옷에만 유행이 있는 건 아니라서 철마다 색조화장 톤이며 색깔도 바꿔야지, 손톱 색도 맞춰줘야지, 그러다보면 그 색이 나한테 어울리기는 하는건지 고민할 새도 없다.
왕성왕성대왕성하게 소비를 하던 나는 결국 허망함을 느끼고 소비의 늪에서 벗어났다. 이제 유행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으로만 산다. 넘쳐나는 화장품 리뷰도 흘끗 보고 넘길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온갖 안맞는 것들을 걸쳐 보았기에 이제 나에게 맞는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이제 더 이상 유행을 따라잡겠다고 허덕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오래오래 입고 쓰고 싶다.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대로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명품을 사기는 커녕 SPA브랜드의 옷도 세일 기간을 노리고, 에코패션은 가격 때문에 구매하기가 망설여진다.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옳은 것!!!을 향해 달릴 정신은 없지만 아무 생각없이 굴고 싶지도 않다. 분명 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다. 하지만 최대한 타협하지 않으려 하고, 타협에는 치열한 고민이 따라야 하고, 그러면서 최대한 소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안다. 그걸 다시 한 번 정리해 준 책이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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