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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五感 part.1 - 청각

by 푸휴푸퓨 2017.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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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행복하지는 않지만 흐려지는 것이 아쉬운 기억에 대한 나의 인사다.

 

<청각, 뉴욕>

  Jeff Bernet의 노래를 듣기 시작한 건 잠깐 내 마음에 들어왔던 당신 때문이었다. 당신이 흘리듯 건넨 추천에 나는 오로지 당신과의 교감점을 찾기 위해 그의 노래를 찾아들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음악은 귀에 이상하리만치 전혀 감기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이 좋아하는 걸 좋아해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재생을 하고 또 했지만 글쎄, 결국 당신의 감정과 나의 감정은 어울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가까워졌다 멀어진 당신에게 내가 Jeff Bernet의 노래를 들어보았다고 이야기 할 기회는 영영 없었다.

  몇 달 후 뉴욕으로 여행을 갔다. 하루 종일 이어폰을 귀에 꽂고 걸어다녔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음악들은 그대로 내 뉴욕의 배경이 되었다. 어느날은 재즈의 뉴욕을, 어느날은 아이돌의 뉴욕을 돌아다녔다. 낯선 뉴욕을 헤메고 다니던 그때 나를 찾아준 건 Jeff Bernet이었다. 가볍고 달달한 이야기들. 어째서 이제사 이 노래가 들리나 의아했지만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여의 시간동안 나는 온통 Jeff Bernet으로 뉴욕을 물들였다.

  뉴욕을 떠나와 나는 한동안 Jeff Bernet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한 소절만 들어도 뉴욕이 떠올랐다. 하루종일 헤메이다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타던, 그의 노래를 듣던 뉴욕의 밤 버스가 유난스럽게 생각났다. 돌아가고 싶다. 타인을 신경쓰지 않는 곳, 그러면서도 배려심이 가득한 곳, 그럼에도 자본 앞에 너무나 매정한 곳, 무서울만큼 매력이 넘치는 곳으로. 어쩐지 뉴욕의 향이 나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상이 시작되었다. 랜덤으로 재생되는 노래들 사이에 문득 Jeff Bernet이 나오곤 했다. 점점 그의 노래가 지겨워졌다. 질렸다. 달달한 그의 가사에 쓸모 없는 짜증이 났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과 해내야 할 일이 뒤섞인 서울에서 처음 보는 여자와 같은 음료를 시키는 스타벅스의 너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니, 내게 필요한 것보다 너무 넘쳤다. 그만큼의 감성을 받아내기에 서울의 난 너무 바짝 메말라 있었다.

  이제는 Jeff Bernet의 목소리를 들어도 뉴욕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뉴욕의 감각이 점점 무뎌져간다. 잠시나마 당신의 기억을 불러내던 목소리였고, 오랫동안 뉴욕을 보여주는 목소리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렇고 그런 팝송일 뿐이다. 짜증과 무관심으로 점철되기 전에 나는 한 외국인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붙잡는다. 한 때 그 목소리는 나의 뉴욕이었다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걸 알아 지나가는 시간이 사무치게 아릿했던 그 밤에도 나는 그 목소리를 들었더랬다고. 그러니까 그 목소리를 들어낼 수 있는 내가, 거기 있었다고.

 

Photo by  Jasper Garratt  on  Unsplash

 

 

<청각, 뉴캐슬>

  '이동진의 빨간책방' 인트로는 잠깐 음계가 이어지다가 이동진 평론가가 그날의 도입부를 읽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팟캐스트가 시작할 때부터 변함 없는 흐름이다. 꽤나 오래된 팟캐스트인데 변화를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뉴캐슬로 어학연수를 갔다. 축구 팀이 아니라면 한국 사람들은 평생 듣지도 못할 이름의 도시로 간 것은 오로지 근처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 때문이었다. 한국인이 아예 없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로움과 고독은 필연적으로 함께였다. 침대에 누워 아, 지금 내가 죽으면 최소한 하루 이상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모르고 지나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던 도시. 그래도 나만 고독한 것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살아낼 수 있는 곳. 흐린 날씨가 매혹적이기도, 지긋지긋하기도 한 그런 곳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러 갔지만 어린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듯한 그 수업들에 온 정신을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팟캐스트를 켜놓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학원 수업을 빠진 날도 부지기수였다. 크게 재미난 일을 하지도 않았다. 돈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주변 도시들로 기차 여행을 다녀올 때도 있었지만 한 달에 한 번 다녀오기도 빠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거기에 있었다. 난방비를 아끼겠다고 옷을 몇 겹을 껴입고 앉아, 앉아있다가, 계속 앉아있다가,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뒷마당을 보다가, 하늘을 보다가.. 몇 개월을 살아도 문득 낯설어지는 거실과 소파와 집과 영국을 느꼈다.

  그럴 때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하는 공상에 잠겼다. 허공에 생각을 흩뿌리다보면 고요가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러면 팟캐스트를 켰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책을 구해 읽을 수 없어 더 간절하게 들었던듯도 싶다. 안돼, 전자책이 아니라 이건 종이책으로 읽어야 해.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읽을 수 없어. 아, 읽고 싶어. 흘러가는 시간 안에 조곤조곤한 음악과 목소리가 새겨졌다. 나를 내 모국과, 그래서 내가 사랑하던 그곳의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과 이어주던 유일한 끈으로.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고서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난 한국어의 양에 질려 선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영어를 그리워 했던 것도 같다. 어쨌거나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했으므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책 팟캐스트를 다시 틀었다. 그리고 인트로를 듣는 순간 마음이 내려 앉았다.

  마음이 내려 앉는 나 때문에 또 마음이 내려 앉았다. 미지근하기는 했지만 따뜻하지는 못했던 그 밤들이 생각났다. 그때의 외로움이 다시 나를 잡아 끄는 것 같았다. 그 기억이 옅어질 때까지 나는 팟캐스트를 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그리워서. 그리운 것들을 그리워하던 그 때가 사무치게 그리워서 그랬다.

  시간이 지나면 감각은 옅어진다. 어느 날부터 그 팟캐스트의 도입부를 들어도 뉴캐슬의 내 집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그 집이 이랬었어' 하며 설명하려 들지 않는 이상 그 집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는 일은 없다. 하지만 그 멍했던 시간과 내 느낌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어서,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지만 글을 써 낸다. 이제 다시 그런 음울한 자유도 젊음도 돌아오지 않을텐데, 그 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건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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