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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처음 만났을 때.

by 푸휴푸퓨 2018.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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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이걸 쓰는 이유는 먼 훗날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돌아보면 지금보다도 더 기억이 변해 있을 텐데 그 때의 기억과 이 글을 비교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다. 처음 만나자마자 조용조용 기록해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소중한 관계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

  Y가 너와의 소개팅을 처음 권유한 건 한 3월 정도였다. 서울로 돌아왔고 나는 행복했다. 남은 건 남자친구 사귀기 뿐이었으니 자연스러운 권유였지만 여전히 두렵고 자신이 없어서 거절했다. 사진을 봤는데 내가 좋아할 만한 스타일의 남자가 거기에 있었다. 아쉬워라. 큰 인연을 놓친 걸지도 몰라. 서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 자신의 일상을 좀 더 단단히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했다. 천천히, 서울에 올라온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행복하고 들떠.

  5월의 토-일-월 짧은 연휴에 D, Y와 함께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정말로 즐거운 여행이었다. 맛집의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섰지만 모든 줄 선 식당이 줄을 설만한 가치가 있었다. 열심히 걷기도 하고 택시도 타고 계속 떠들고, Y 덕에 좋은 숙소에서 저렴하게 묵으며 치킨과 맥주를 마셨다. 아쉬운 점이 하나도 없는 여행이었고 정말 또 가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D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사귀던 남자친구와 이별한 것이 후회스럽고 다시 붙잡고 싶다는 거다. D가 그 고민을 하루 내내 했으니 나와 Y도 내내 그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 한 카페에 갔을 때에도(줄을 서지 않은 이 카페의 커피는 참 맛이 없었다) 여전히 D의 고민이 이어졌다.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니 에잇, 연애 너만 하냐!는 마음이 점점 솟아올랐고, 나도 한다!를 외치며 Y에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선언했다. 그때 그 남자 아직 할 수 있을까? 부랴부랴 Y가 자기 친구에게 연락했더니 여전히 된단다. 떨려 할 새도 없이 연락이 바로 왔지만 애들이 카페에서 내 카톡 대화만을 집중하게 생겨서 얼른 말을 끊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는 기색이라 느꼈다고. 이런이런.

  Y는 컴활 스터디에서 만난 같은 나이의 남자애가 인성이 참 좋은데 그 친구가 인성을 보장하는 남자라고 했다. 그런데 컴활 스터디 친구라 이것저것 세세하게 물어보기가 어렵다고. Y, 그럼 그 컴활 스터디 친구 인성은 너가 보장해? 했더니 그렇다고. 그럼 난 우리 Y를 믿으니까. 친구의 인성을 믿는 것과 얼굴 사진 단 한 장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만남이었다. 토-일까지만이 여행이었지만 그럼 혹여 월요일에 만나자 할까 싶어 그날도 여행이라 했다. 그리고 여행이 마무리되었을 즈음으로 보이는 월요일 저녁에 카톡이 왔다. 

  무난한 대화를 했다. 서로 정보(정확하게는 조건)를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간단하게 취미가 뭐예요, 이런 질문이 오갔다. 책 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더니 방의 책장 사진을 찍어주었다. 벽면 전체가 책장이었다. 역사 책이 가득했다. 설마..? 설마 3역사 선택자냐니까 그렇다고 했다. 사실 책보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고, 어벤저스를 이미 봤다고 했다(이제 보니 책은 그냥 책이 아니라 만화책이지만). 그리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몇 시간을 했던 것 같다. 새벽까지 이야기하다 토요일에 만나자던 약속을 화요일 저녁으로 옮겼다. 그렇게 자꾸 기대를 하시면 제가 아니라 천사가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ㅎㅎ 부둥부둥 달달한 말을 정말로 잘 하는 사람이었다. 미리 소개팅용 옷을 사두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양재에 내가 먼저 도착할 것 같았는데 조금 늦었다. 민원 전화를 받으며 멘탈이 약간 흔들린 날이었다. 화장을 고쳤고 약간 땀이 났다. 출구 바로 앞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네가 출구 앞에 서 있었다. 저 사람이구나. 떨렸는데 안 떨리는 척 말을 걸었다. 카페에서 네가 아메리카노를 사줬다. 떨려서 민망한 거였는데 늦게 와서 숨이 찬 것으로 했다. 네가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 했다. 카톡으로 이야기하던 전공 선택과 대학 시절 이야기였던 것 같다. 서로 졸업한 학교를 얘기했는데 네가 주눅 들지 않았다. 좋은 학교라고 되뇌는 짓이나, 좋은 학교를 나와서 인생을 편안하게 산다는 뉘앙스의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감 있는 네가 좋았다. 그냥 날 즐겁게 해주려는 이야기만 계속했다.

  민원 때문에 지쳐버린 나 대신 네가 끊임없이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서 치맥을 마셨다. 이날 네가 맥주를 마시게 만든 걸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다. 재밌게 얘기를 했고, 더불어 나도 네가 좋은데 좀 천천히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둘이서 치킨 한 마리를 채 다 못 먹고 나와 잠깐 걷다가 같이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다. 자리가 하나 나고 또 곧 옆자리가 비었다. 옆을 톡톡 쳤다. 어색하게 네가 앉았다.    

  두 번째 만난 날, 사귀기로 했다. 사귀자고 말할 것 같았어. 내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지 않았고. 어벤저스를 이미 봤다고 한 너에게 뻔뻔하게 한 번 더 보자고 했다. 먼저 도착해 역에서 기다리는데 약속 장소 가까이로 정말 빠르게 직진하는 너를 발견했다. 누구야, 하고 부르기가 민망해서 저... 저..... 저기... 하다가 결국 야! 하고 불렀다(나중에보니 이것도 서운했다고..). 내가 신경 써서 옷을 입고 왔음을 네가 알아차려 버렸다. 스타벅스에 가서는 네가 단 음료를 잘 마신다는 걸 내가 알아차렸다. 그러게, 그렇게 넌 단 걸 좋아하는데 요즘 나 때문에 먹으러 가지 않는 걸까?

  매일 카톡도 오래 했던 우리는 이미 꽤나 잘 지내고 있었는데, 네가 커플석 맨 뒷자리를 골라왔다. 그나저나 합정 롯데시네마 커플석 맨 뒷자리는 그냥 좌석이다. 자리 모양새로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네가 귀여워서 한참 웃었다. 이때 영화를 보면서 손을 잡았던가? 팔걸이를 올렸나? 언제 처음 손을 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도 내가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는 적당히 재미있었다. 에머이에 데려갔던 날이 이날이던가. 너는 쌀국수집에 가서 쌀국수가 아니라 볶음밥을 먹는 사람이다. 합정에서 내가 탈 지하철이 들어오기 전 너는 급하게 우리가 사귀는 거냐고 했다. 그럼, 싫으면 만나겠어? 물었더니 안심하는 것도 또 귀여웠다. 근데 나중에 저건 질문이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다며 전화로 한 번 더 물어왔다. 나도 너가 좋으냐고. 좋지 바보야.

  그렇게 사귀고는 3일 만에 네가 회사 임원과 술을 떡이 되게 마시고는 내게 건강의 비밀을 털어놨다. 그땐 엉엉 울었는데 지금은 그냥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같이 노력하잖아. 이런저런 일들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잘 사귀고 있다. 너는 내 말을 정말 잘, 진심으로 들어준다. 너와 있으면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 같고, 자존감이 하늘로 치솟는다. 뭘 해도 예쁘다고 해주는 너. 사랑한다고 매일 말해주는 너. 보고만 있어도 좋은 너.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할 만큼.

  지난 주말이 너무 행복했었다. 네가 내내 내 옆에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행복했다. 행복이 보송보송 샘솟았고,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특별한 걸 하지도 않았는데 너는 나를 구름 위로 데려간다. 손을 잡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하며 걷는 시간이 좋다. 짧은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거나 부드러운 손을 만지작거리는 게 좋다. 네가 나를 사랑해주어서 좋다고 말했다. 사랑이 지나갈까봐 얼른 붙잡아 글로 박제해 두었다. 언젠가 이 글을 보고 행복해할 수도, 슬플 수도 있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붙잡아 놓은 이 장면들에 나는 다시 행복하니 그걸로 되었다. 좋은 순간들이었다. 지금도 좋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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