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차별을 이야기하는 책을 많이 읽는다. 일부러 의식해서 고르지 않는데도 자주 본다.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도 하는 입장에서도 자유롭지 않아 읽기 편안하지는 않다. 그래도 자꾸 불편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읽었고 깊이 공감했다. 두 권 모두 요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자친구와 함께 고민하고 싶었어. 하지만 내 태도는 다르다. 하나는 읽자마자 남자친구도 보여주려 구입 했는데 나머지는 차마 보여주지 못하겠다. 사실 이 책을 읽었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을 확률이 높다. 너는 갈등을 싫어한다.
네게 말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 그 범위는 나 혼자 정했다. 너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 노력한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듣기는 하는 마음도 알고 있다. 그런데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심지어는 감추려 노력해도) 나는 그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참 잘 보인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가 범위를 벗어나 언짢을지 상상한다. 혹여 기분이 상해 네가 듣는 범위가 더 좁아져 버릴까봐, 나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까봐 겁이 난다.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TV 프로그램이 주제인 페미니즘 도서를 집에 빌려갔을 때, 엄마는 먼저 읽고 그 책은 읽지 말라 했다. 너무 많이 알면 불행하대. 나는 듣고 웃었지만 어쩐지 그 책은 읽지 않고 반납해버렸다. 아니, 사실 나는 내가 왜 읽지 않았는지 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또 하나의 문화’에서 나온 책을 좋아했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다. 시댁에만 가면 엄마는 아빠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말부터가 그런데 나머지는 어떻겠어. 엄마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만 불행했다. 아빠는 엄마의 그런 불행을 여전히 눈치 채지 못한다(어쩌면 알면서도 눈치 채지 못한 양 행동하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오늘 듣똑라에서 ‘탈연애’를 다룬 컨텐츠를 들었다. 탈연애라는 개념은 처음 들어 봤지만 왜 논의되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탈연애라는 말 자체를 아는 남녀의 비율이 눈에 띄게 다르고, 반응도 판이하다 했다. 놀랍지도 않지. 어떻게 안 그렇겠어. 중앙일보 밀실에서 나온 기사에 2019 연애 모의고사를 보면 숨이 막히는 문항들이 나온다. 난 그 중 단 한 개도 듣지 않는 (축복받은?)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이 드는데, 대체 이게 뭘까.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의 편도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을 읽고 마음이 아팠다. 너는 중립을 좋아한다. 모두 잘 지냈으면 좋겠대. 하지만 갈등을 유발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이 유지될 텐데, 그걸 갈등보다도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세상에는 이렇게나 많다는 말이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또 사랑도 받고 싶은 사람이라 너의 중립에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착하다고까지 말한다. 네가 나를 극렬한 페미분자와 분리해 난 이해하지만 그 사람들은 틀렸다는 투로 이야기할 때면 미친 듯이 외치고 싶다. 그 사람과 내가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외치지 않는다. 사랑은 중요하다. 뭐가 더 중요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럴 생각은 없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혹시 너와 헤어지면 나는 다음 연애를 굳이 하려 애쓰지는 않으려 한다. 난 좀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알지 못하는 이에게 좋게 이야기하며 설득하는 일에 지쳤다. 솔직히 너만큼 열린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다. 이렇게 빨리 지쳐버리는 내가 한심한 마음도 들지만 왜 굳이 애써가며 누굴 만나야 하나 싶다. 대신 너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넌 내가 검열하며 고통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 아파할 사람이다. 그러니 계속 해야지. 언젠가는 꼭 검열 없이 네게 책을 건넬 수 있기를. 우리 모두 다, 너도 나도 다 행복하기를.
p.s. 내가 종종 네게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대해 정확히 나와 있어 기록해 둔다. 반성해야지.
사랑의 다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친절한 타인으로 남을 수 없는 걸까. (중략) 여전히 나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들 때가 많지만, 많은 부분 이 욕망이 상대를 위하는 게 아니라 내가 편해지기 위해서란 걸 떠올리며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니라면 말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누구도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사람도 누군가의 구원이 되지는 못하니까. 상대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서 영향을 주는 것보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 친절한 타인으로 남는 게 더 어렵다. 관계 맺음의 상상력 갖기. 존재 앞에서 겸손해지기. 그것이 관심이 아니라 침범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중앙일보 밀실(밀레니엄 실험실) “한국남자랑 연애 안해” 20대 여성 절반이 ‘탈연애’ 왜
:: https://news.joins.com/article/2358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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