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마지막 주의 데이트는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취향을 저격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데이트의 내용은 비밀로 한다(늘 자세히 말한 것도 아니지만은). 집이 빈 틈을 타 남자친구가 집에 와 하룻밤 자고 갔다. 편안하고 따뜻한 데이트였다.
집이 빌 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네게 신나서 말했다. 너는 벌써 한 번 집에 온 적이 있지. 토요일 낮에는 내가 약속이 있었던 터라 저녁 시간에 맞춰 선물처럼 네가 왔다. 저녁을 해 줄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난 너무 일찍 파스타 면을 불에 올렸다. 결국 면 2인분을 버리고(이런 적이 없는데!) 우왕좌왕 고기를 구워 저녁을 먹고. 네가 사 온 너무나 먹고 싶었던 딸기 케이크까지 먹으니 천국이더라. 겨울왕국 1편을 보면서 2편보다 낫다는 둥 시답잖은 이야기도 하고 설거지도 시켜보고요. 너는 주방세제를 푸욱 짜서 느릿느릿 그릇을 닦았다. 뒤에서 오래 안고 있을 수 있어 좋았어.
네게 민낯을 공개한 지는 이미 오래기에 편하게 파자마 차림으로 널부러졌다. 민낯이 더 예쁘다는 이야기는 보일 때마다 듣는 이야기지만 때마다 고마워. 풀썩 기대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는데 이렇게 오순도순 TV 보며 살면 따뜻하니 괜찮겠다 싶었다. 바깥에서 쓸쓸해진 마음을 따뜻한 밥과 너와 함께 다독여 채울 수 있다면 분명 자주 좋으리라. 오래간만에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만나서 신나게 봤다.
그만 자자고 졸립다 한 사람은 나였는데 쿨쿨 자는 사람은 너였다. 네가 코를 고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자신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봐. 최근 몸무게가 살짝 늘어서 그런지 너의 탱크는 더욱 요란해졌다. 으히, 귀에 꽂아 들어오는 코골이를 사랑으로 이겨내 보려 노력은 했다. 그리고 졌다. 스르르 네 품을 빠져나와 거실 소파에 누웠는데 거실까지도 네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코골이가 거센 건 괜찮지만 무호흡은 참을 수 없어. 신년에는 너와 함께 꼭 다이어트하겠다 다짐하고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소파의 나를 발견한 네가 나와 자리를 바꾸어 주었다. 미안. 그래도 어느 순간 정신 차리니 다시 침대에서 둘이 쿨쿨 잘 자고 있더라.
느즈막히 일어나서 네게 몇 가지 메뉴를 제시했는데 네가 가장 간단한 구운 빵을 선택했다(흑흑 왜!). 빵에 야무지게 크림치즈도 발라먹고 바나나에 요거트도 먹고 한라봉도 까먹고 커피도 홀짝홀짝. 적당히 씻고 나가 놀으려 했는데 글쎄, 언니가 저녁에나 들어온다잖아. 집이 생각보다 오래 빈다는 소식에 그대로 눌러앉아 네 가방을 검사하겠다며 들여다본 나는 네가 오카리나를 들고 온 걸 발견했다. 네가 부는 모습도 보고 나도 삐리리리 불어 보았지. 오랫동안 듣고 싶다 조르길 참 잘했어. 너는 오카리나를 불고 있는 네 모습이 멋지지 않게 느껴져 취미를 접었다 했는데 난 너무 귀엽기만 했다(누구야 놀린 사람!). 삐익 삐익 불어대기도 지친 우리는 다시 기대 누워 너의 이름은을 봤다. 날씨의 아이보다 더 좋았어. 서로 너의 이름은!?을 외쳐가며 까불다가.. 까불다가... 그 이후에 대체 무엇을 했는데 오후 시간이 다 갔는지 모르겠지만 Anyway, time flies. 눈 깜짝할 새 저녁이었다. 네가 마라샹궈를 먹으러 나가자고 하기는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1 너는 분명 마라를 좋아하지 않는데 나를 위해 제시한 메뉴 같고 2 괜히 배앓이라도 하면 마음이 쓰일 것 같아서 처갓집 치킨을 시켜먹었다. 아구아구, 맛있었어.
넷플릭스 드라마를 두어편 마저 본 뒤 남은 뒤편은 꼭 같이 보자 다짐하고 너를 보내려니 어쩐지 섭섭했다. 명절마다 스무 명을 순식간에 떠나보내던 할머니 마음은 오죽했을까, 문득 생각했지. 우리는 다음 주말에 바로 또 볼 건데 이리 아쉬워할 일일까! 그래도 아쉬워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따악 한 대 보냈다. 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스러웠어. 우리 사이에 이제 떨리면서도 낯선 긴장은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긴장은 여전해. 너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도 질리지 않는다. 풍성한 네 머리도 토실한 네 배도 넓은 네 어깨도 좋아. 높아서 너의 자랑인 코도 짤뚱한 혀도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사랑을 말해주는 네 눈도 좋지.
휴. 사랑은 말하다보면 끝이 없으니 그만 마무리하겠다. 아홉 시 좀 넘어온다던 언니는 10시 반이 다 되어가는 데도 오지 않는다. 너의 공부가 무사히 끝나기를, 우리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기를, 그렇게 될 수 있게 오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기원하면서 이틀의 기록을 끝낸다. 또 이런 기회가 온다면 다시 예쁜 추억을 꼭꼭 쌓아야지. 그전까지는 어제와 오늘을 예쁘게 추억할 테다. 부모님이 눈치채지 않도록 깔끔한 청소는 덤으로 해보자. 만세! 2019년의 너는 내게 행복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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