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맥시멀리스트다. 맥시멀을 사랑하는 취향은 구제할 길이 없어서, 여전히 책상 앞 메모판은 엽서로 가득하다. 가득가득 채워져 있는 모양을 보면 기분이 좋다. 대학생 시절 장식품이 가득한 방을 보여준 기록(방 자랑, 향수 자랑)을 보면 나의 맥시멀리즘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 많은 물건을 다 좋아했어.
그런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이 얼마나 큰 일인지. 작년부터 짐을 줄여나가는 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지만 나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그래서 2020년 목표 중 하나로 "방 안의 물건을 절반만 남기자!"를 세웠지. 정리만 하면 되니까 쉬우리라 믿고 야심 차게 절반이라 정했다.
결심은 좋았지만 막상 1년 가까이 정리한 방을 더 비우자니 쉽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필요한 물건만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의욕이 짜게 식어가던 와중 어디선가 "호텔이 좋은 이유는 꼭 필요한 물건만을 잘 디자인된 상품으로 구비해두었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을 보고 번쩍 눈이 뜨였다. 그래! 필요하다고 이고지고 있는 방이 아니라 처음 들어간 호텔방 같은 산뜻한 방을 만들고 싶다! 고심하다 강제적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에 한 개의 물건을 버리는 나만의 '물건 버리기 100일 챌린지'를 시작했다.
챌린지라고 붙이고 나니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미련이 남았던 것에 쉽게 정을 뗐다. 이 서랍을 비우기 위해 저 서랍에 물건을 옮겨두고 결국 저 서랍도 비우기 위해 물건을 처분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한 번에 버리면 좋겠지만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서서히 정리된 상태에 물들어가야 다시 되돌아가지 않을 것 같기도 했고. 결국 1m 폭의 옷장 하나를 비웠다. 중간에 옷장을 새로 살까 진지하게 고민도 하고 실제로 가구도 보러 다녔는데, 미니멀리즘의 결론이 100만 원짜리 새 옷장인 건 어불성설이란 생각이 들어 그만 두었다. 다시 살펴보니 옷장이 내부를 유기적으로 변경할 수 있더라고. 고등학생 때부터 쓴 옷장인데도 그런 기능이 있는 줄은 이제 알았다.
옷장을 보내고 나니 침대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침대를 옮기니 방 안에 넓은 공간이 생겨났다. 방에서 운동을 하노라면 늘 비좁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행복하다. 10년 넘게 지낸 방인데 마치 새 방인 양 생경한 기분에 밤에는 잠이 오질 않더라.
몸과 마음의 군더더기를 줄이고 싶어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나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자꾸 나온다. 돌아오기도 하고 미적거리기도 했지만 차근차근 어제보다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서 기쁘다. 앞으로도 방은 계속 변하겠지. 깔끔한 방이 되었으면, 또 내가 그 방에 어울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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