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의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한 후 자주 체감하는 심경의 변화는 남아있는 물건을 아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러 개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남겼거나 오래 고민해서 고른 최상품이니 그럴 수밖에. 매일 좋아하는 물건을 사용하는 셈이라 나를 늘 대접하는 기분이다. 나는 사랑받을 만 해. 예상치 못한 미니멀라이프의 장점이다.
짐을 줄이면서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에코백을 정리했다. 가볍고 커서 책을 들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라 나는 매일 에코백을 맨다. 좋아하는 두께와 손잡이와 크기와 디테일이 나도 모르는 새 생겨났다. 너무 얇거나 흐물거리는 에코백은 가방을 위한 더스트백으로 쓰기도 하고, 당근마켓 거래 시 봉투 대용으로 넘겨드리기도 했다.
한때는 아무 에코백이나 쓰기도 했다. 어딘지도 모를 기관의 로고가 들어간 가방을 대충대충 멨다. 하지만 내어놓기 부끄러운 걸 들고다니는 마음은 어두워서, 내 모습이 초라하고 예쁜 가방을 메고 다니는 지인들과 내심 비교를 했다. 나는 왜 이러고 살지? 나 하나 이런다고 부자가 되고 환경이 좋아지나? 좋아하는 에코백을 든 날과 그렇지 않은 에코백을 든 날의 기분이 확연히 다름을 깨닫고 나서는 오로지 좋아하는 백만 맸다.
좋아하지 않는 에코백은 사용하지 않는데다 물건이 많은 것도 반갑지 않으니 에코백을 무료로 받는 상황이 예전처럼 좋지 않았다. 필요도 없으면서 괜히 탐내던 마음은 다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 어제는 회사의 어느 부서에서 에코백을 제작해 전 직원에게 나눠주었다. 신경 써서 나눠주시는 거라 주는 대로 받았다. 이걸 또 어쩐담.
집에와서 펼쳐놓고 보니 도톰한 캔버스 천에 손잡이도 튼튼하고(얇은 캔버스 천으로 만든 손잡이는 사양이다) 바닥도 입체적이다. 하지만 전면부에 커다랗게 회사의 로고가 있고 안쪽에 작은 주머니도 없다. 으음, 내치긴 아깝고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군. 고민하다 너무 좋아하지만 낡아가서 넣어만 두고 있던 에코백을 꺼냈다. 버리긴 아깝고 멀쩡한 부분이나마 잘라서 어디라도 쓰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이렷다.
중학생 때 가정시간 바느질 수행평가의 결과물을 보고 엄마는 '이런 것에 점수를 매기셔야 하니 선생님이 참 힘드셨겠다'는 솔직한 평을 했다. 내 눈에도 엉망이어서 일말의 상처도 받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게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었다는 거다. 그 이후에도 난 바느질에 영 젬병이었다.
손이 들어갈 쪽은 두 번 접어 올이 풀리지 않게 꿰매고, 똑딱이 단추를 달고, 나머지 삼면을 에코백 전면에 붙이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재봉틀을 꺼낼 부지런함만 있었다면 5분 안에 끝났을 일. 나는 PT를 받고 와 후달리는 손으로 무려 두 시간을 작업했다. 제대로 박고 있나 계속 확인하면서, 조금 느슨한 게 좋을까 폭을 줄일까 모서리를 둥글릴까 생각하면서.
바느질과 고요한 사투를 벌인 끝에 갖게 된 완성품은 마음에 더 들 수조차 없게 쏙 들었다. 돈을 주고 샀더라도 이만큼 마음에 들진 않았겠지. 어쩌면 무심코 버렸을 낡아버린 에코백과 마음에 들지 않는 에코백이 더해져 200점짜리 새 가방이 생겼다. 얼마나 기분 좋게 들고 다니겠어. 바느질하는 동안은 아무 잡념이 들지 않아서, 명상 대신 바느질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미니멀이 별 것일까. 가진 걸 재활용하고 나로 인해 물건이 과잉생산되지 않게 유의한다. 이미 생산되어 소유하게 된 물건은 그 쓰임이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용한다. 나의 미니멀라이프는 이렇게 소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매우 만족스럽다.
추신. bear라는 글씨가 쓰여진 회색 에코백은 몇 년 전 퍼블리셔스테이블에서 샀다. 동명의 잡지가 있는데 출판사에서 행사용으로 제작하여 판매하셨고, 보자마자 반해 1만 원을 주고 샀고, 마르고 닳도록 들고 다녔다. 손잡이와 모서리가 헤어지기 시작해 마음이 안타깝던 차였다. 이 에코백을 산 그때의 나를 몹시 칭찬한다. 몇 년은 더 뿌듯해야지.
추신2. bear 매거진 에코백이라고 검색했다가 아래 글을 찾았다. 역시, 나만 좋았던 게 아니었어!
*북바이북 에코백 제작 후기
'CHAT > MINIMAL LIF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니멀라이프란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0) | 2021.08.02 |
---|---|
내가 만족하는 미니멀라이프 실천 2 - 잉여 옷 소비하지 않기 (0) | 2021.07.07 |
제로웨이스트샵 방문기 4 - 비그린(B:Green) (0) | 2021.06.14 |
제로웨이스트샵 방문기 3 - 알맹상점 다시 가기 (1) | 2021.05.25 |
물건 버리기 100일 챌린지 4: 심플하게 살아가는 풍요로움에 대하여 (0) | 2020.1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