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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

2022.2.11. 물고기는 인간이 만든 언어일 뿐

by 푸휴푸퓨 2022.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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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굴러가고 자잘한 일은 계속 있다. 내 자리가 어디쯤인지 고민한 한 주.

1.

  실 내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한 명은 알고 있었는데 한 명은 뜻밖이었다. 상사는 발령 3주 전 모두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당연히 갈 사람의 마음이 떠났지. 그들의 잦은 연가 사이에서 나도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하루쯤은 쉬어야겠다 싶었다.

  부서의 변화를 보며 내 자리를 되돌아보았다. 사회생활을 한 지도 벌써 햇수로 7년 째니 진급이 빠른 회사라면 과장도 무리 없을 연차다. 사실 작년 초 부서 이동 때만 해도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야지!' 식의 신입 마인드였는데, 1년이 지나고 이제는 정말 신입이 아님을 실감한다. 인원을 감축하겠다는 상사의 결정은 나와 다른 이가 1인분 이상의 몫을 하겠다고 예상했기 때문일 터. 이제까지는 배우겠다는 자세로 모든 걸 받아들였다면 앞으로는 주체적인 태도를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과장까지는 무리고 대리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뭘 좀 아는 대리가 되어야 하지 않겠어.

  어쩌면 그것은 이제까지의 Yes인생에서 벗어난다는 뜻일지 모르겠다. 사실 상사에게 Yes를 하고서 얻은 이득 덕에 편안했다. 이해득실을 따지면 완전한 손해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앞으로는 No를 하겠다 이 말이에요. 내게도 입이 있고 자아가 있음을 알면 저 사람 좋은 상사는 내심 놀라려나.

 

2.

  지난주 금요일에는 다른 부서의 웬놈이 버럭 화를 냈다. 내 잘못이 전혀 아닌 일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나를 불러서, 내가 아무 상관이 없음을 깨닫고 난 뒤에도 화를 냈다. 그 부서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모르는 척을 했다. 남의 사무실에서 개쪽을 당하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지만 악착같이 감정을 눌렀다. 내 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심호흡 횟수를 세며 천천히 10번을 채웠다.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 두 명이 그 업무의 결재자였기 때문에. 마침 그날 자리에 없는 담당자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 씌우는 꼴을 눈뜨고 봐야 할 테니까.

  화내는 상대를 쳐다보면서도 이를 악물고 화를 참았다. 신사임당의 팟캐스트에 나왔던 정문정 작가의 말을 기억하며, 악착같이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이 글의 2번에 언급되어 있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알아보겠다는 말만 남겼다. 내 이야기에 상황을 파악한 상사는 바로 문제를 해결하고 새 공문을 올리게 했다. 금방 해결될 일이었다. 해결했다는 전화를 걸 마음은 들지 않아 사내 메시지만 남겼다.

  그 자리에서 되받아치며 화를 내지 못한 것이 이틀쯤 마음에 걸렸다. 앙금이 남아서 주변 사람에게 말도 했다. 내가 호구처럼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닐까, 회사에서 너무 싫은 소리를 못 하는 것도 좋은 태도는 아닌데.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번 주 그 사람과 두세통의 통화를 했고, 나는 그저 AI처럼 필요한 말만 했다. 나는 너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아. 내 친절은 너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네가 무엇이든 상관이 없어서야. 평소와 다름없지만 다름없어서 이상한 내 태도에 그 사람은 머쓱해했다. 웃기지도 않지. 오히려 결국 나는 별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난 게 좋은 선택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더 싸늘하게 무감정을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물론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그 일이 있자마자 나는 편안한 동기 카톡에 쌍욕을 쏟아냈다. 화가 나서 문장을 완성하지도 못하고 그저 "이 씨발"만 몇 번이고 외쳤다. 진정이 된 후 다시 읽어보니 마치 아는 말이라곤 씨발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좀 더 수양하면 쌍욕까지는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거친 말은 거친 감정일 때를 위해 아껴두고 있지만, 거친 감정일 때도 품위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수양이 더 필요하다.

 

3.

  유난히 이번주에는 운동이 잘 됐다. 잘 되니 신이 나서 열심히 스퍼트를 올렸다. 평소보다 무거운 레그 프레스 무게를 견디고 20kg 바에 무게를 더 얹어 벤치프레스를 했다. 천국의 계단을 인터벌로 오르며 드라마를 보고 박신양의 씁씁후후를 떠올리며 러닝머신에서 9.0으로 달렸다.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운동이 재미있었다. 재미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살면서 운동이 재밌다는 생각을 하는 날도 있다. 조금 더 궤도에 오르면 괴로움이 아니라 즐거움을 위해 달릴 수 있을까. 운동의 즐거움이 뭔지도 모르겠다가 이제 조금 냄새만 맡은 기분. 나중엔 맛도 알게 되겠지.

 

4.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좋아하는 유튜버 김겨울이 자신의 책 추천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무작정 추천할 만큼 강력 추천한 책이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 언어는 절대적이지 않기에 내 언어에 어떤 모순과 한계가 있는지 돌아보자는 뜻에서 되짚는 말이다. 애초에 분류라는 게 인간의 언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분류에 목매는 사람을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비단 분류만이 아니라 개인이 천착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고 따라가면 경각심을 느끼게 했다. 결국 인간의 사유에서 맹목적인 믿음은 위험하다는 진리.

  너무 좋아서 다른 이에게 꼭 읽어 보라고 발을 동동 구르지는 않겠지만, 가끔 매너리즘에 굳어가는 나를 느낄 때 삶에 신선함을 환기시킬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막 엄청 좋지 않은데 추천하고 싶다니, 그냥 좋다고 인정하는 게 나을 것도 같다.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닥에 떨어진 김으로 느껴보는 삶의 부조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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